20200201-여행4일차
여행 일정을 미리 짜두지 않은 건 내가 게으른 탓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파리 교통 파업이 있을 때였고, 또 날씨가 오락가락하니 만약 비바람이 친다면 그냥 숙소에 있을 계획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경우에는 무슨 패스 같은걸 미리 끊으면 저렴하고 그걸로 다른 것들도 할인이 된다 그랬던 거 같은데... 몰라 내가 알게 뭐람.
날씨가 그나마 좋은. 여기 와서 가장 좋은 편이어서 밖으로 많이 돌아다녀야지 생각했었다. 일단 전날 가이드님이 추천해주셨던 오르셰 미술관에 갔다가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에펠탑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 라고만 생각하고 숙소를 나왔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유럽에선 함부로 미술관이라 박물관을 가는 게 아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처럼 나는 또 본전 생각에 모든 작품을 보리라 욕심을 부렸고 이게 늦은 점심으로 이어졌다. 일단 이곳에 온 목적이었던 고흐의 작품들은 눈으로 봤으니 만족.
점심도 미술관 안에서 해결했는데, 나야 뭐 일단 직원에게 추천을 받는 타입이니까 이번에도 추천 고고. 적당한 스테이크와 글라스 와인을 시켰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람.
아주 만족할만한 식사를 마치고 (날씨가 좋으니) 천천히 걸어서 에펠탑 쪽으로. 사실 에펠탑은 여행 오기 전부터 뭐랄까 ‘동경의 대상’ 같은 거여서 기대를 잔뜩 했었다. 걸어가면서 건물들 사이로 살짝살짝 보일 때부터 두근두근. 실제로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멋졌고 웅장했고 위엄이 있었다.
어딜 가나 한국인이 있었기에 부탁해서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한쪽에서 공연 같은 걸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앉아있던 한국 사람을 무대로 불러 같이 ‘말춤’도 추고. 마치 홍대처럼. 계단에 앉아서 그들의 공연을 즐기다 팁을 좀 주고 한적한 곳으로 내려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아이폰 스피커로 음악을 틀었는데 그때 들은 음악이 christian kuria의 too good. 원래도 좋아하던 음악인데 이제 이 노래를 들으면 이때 이 곳이 생각난다. 역시 노래의 힘이란.
에펠탑에서 불 켜지는 것을 보고 마지막으로 유람선을 타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슬슬 유람선 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낯선 남자가 말을 걸기 시작.
뭔가... 또 집시들인가. 아님 소매치긴가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있는데 어디서 왔냐로 시작해서 자기는 아프간에서 왔다(아프간? 그 뉴스에서 봤던 그곳?). 나도 한국에 가본 적 있다 등 자신의 TMI를 쏟아내다가 내 번호를 물어봄. 그래서 내 번호는 왜 묻냐 했더니 연락을 하고 싶다고. 허허. 이거 뭐지? 그러다가 번호는 좀 그렇다 했더니 그럼 페이스북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그래서 페이스북 안 한다 했더니 뭐 그럼 다른 SNS 계정을 가르쳐 달라고 하길래 부담스러워져서 그런 거 안 한다고 했더니 아쉬워하며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가르쳐 줌(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흠). 연락하고 싶다고. 하필 가는 방향이 같아가지고 좀 난감했지만. 짧은 다리로 엄청 빠르게 걸어서 선착장까지 도착했다.
배 떠나는 시간이 좀 남아서 간이 휴게실에서 커피와 바나나로 몸 좀 녹이고 있는데 옆에 아주머니가 말 거심(나는 어딜 가나 심지어 외국일 때도 사람들이 길을 물어보는 타입이다). 한국 사람이냐고. 한국 사람들은 허기질 때 꼭 바나나를 먹는다며. 간단하게 몇 마디 나눴는데 저 내용밖에 기억이 안 난다. 바나나만 기억날 뿐.
파리의 야경은 그것도 배 타고 보는 야경은 생각보다 더 멋졌는데 맘껏 즐기려던 찰나 슬슬 비가 오더니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우비를(추위 대비, 비 오는 것 대비) 항상 가지고 다녀서 얼른 뒤집어썼지만 다른 사람들은 낭패 아닌 낭패. 다들 비를 피해 안쪽으로 들어가고 나만 아주 여유롭게 즐겼다.
카메라만 좀 좋았어도... 야경 사진을 많이 찍어 올렸을 텐데 아쉽다. 약 한 시간 동안 배를 탔는데 에펠탑은 올 때와 갈 때 두 번 보여준다. 비가 와도 불빛에 빛나는 에펠탑은 멋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릴 때가 다 돼서야 비가 그쳤는데 뭐 나는 상관없었다. 시간이 되면 마지막 날에 또 보러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