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다하다 이제 관음증까지.

열번째 이야기

by 오 광년


버스 뒷문이 열리고 동영상을 보면서 중학생이 내린다. 그 뒤로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복자가 뒷따른다. 저녁 7시도 안 됐지만, 주변이 어둑하니 갑절은 더 피곤한 것 같았다.


“ 겨울은 이게 싫어. 괜히 서글퍼지는 거.. 으~”


가로등 불이 하나, 둘 켜지고 길바닥 노랗게 물들었는데, 자세히 보니깐 은행잎들 축축하게 젖어 들러붙어 있다.


그 때, “끼-익-끽” 날카롭게 아스팔트 가는 바퀴소리가 귀를 때렸다.


“ 아~씨 뭐야. 감성 좀 잡고 있는데...”


투덜거리며 소리가 난 곳을 째려보는데, 한눈에 보아도 상당히 이색적인 모양의 빨간색 스포츠카가 나타나 있었다. 이 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차종이었다. 저런 차는 누가 운전하나 싶어 눈길이 한 번 더 가던 중에, 조수석 문이 위로 활짝 열렸다. 오호! 신기하네.


근데, 갈색 머리에, 헐렁한 회색 후드자켓을 대충 걸쳐입은... 뒷모습이 꽤 눈에 익다.


뭐야? 저거.. 양아치?


제이가 심드렁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고 나니 위에서 아래로 문이 저절로 닫혔다.


“ 뭔 놈의 차 문이 희한하게 닫히네... 이건 무슨 킹스맨이야? 스타워즈야? 참- 돈 지랄하는 것들끼리 친구하는구만..”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궁시렁거리는 복자, 그러면서도 빨간색 스포츠카와 제이를 계속 훔쳐보는 데 열중이다.


그 때 “ 빡-” 짧고 강렬한 경적음이 울리고, 복자는 감전이라도 된 듯이 흠칫 놀란다. 차에서 내려 앞으로 가던 제이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으로 뒤돌아본다.


복자는 아주 재빠른 속도로 옆에 있던 파란색 1톤 트럭 뒤로 몸을 숨겼다. 어디서 그런 순발력이 나왔는지... 수북이 쌓인 배추 산 뒤로 복자의 까만 머리가 빼꼼히 솟아 올라왔다. 황급히 숨으면서도 속으로 아이씨 나 지금 뭐하는 건데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뒤돌아 걸어가는 제이 뒤로 다시 한번 “빽-” 경적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또 울렸다. 보이는 건 뒷통수였지만, 왠지 짜증이 느껴졌다. 홱 돌아선 제이가 다시 스포츠카 쪽으로 걸어가 고개를 숙이니 운전석 창문이 유려하게 내려왔다. 반쯤 내려가 창문 안으로 긴 머리에, 조막만한 여자의 얼굴이 반쯤 보였다. 그리곤 그 윤곽이 어떤지 살펴보기도 전에, 운전석 쪽에서 뻗어져 나온 팔이 능숙하게 제이의 목을 휘어 감더니 두 사람은 입을 맞추었다.


헉!!!


복자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까봐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무리 남의 연애 구경이 재밌다고 하지만, 남이 키스하는 장면까지 숨어서 보는 데 제 뱃속이 우르르우르르 떨리는 건 무슨 경우냐고. 김복자 이제 하다하다 관음증까지 생긴 거니. 괜히 훔쳐보는 자신이 주책스럽고, 민망해지는 건 나중 문제고 일단 들키지 말고 끝까지 숨어야 한다.


제이는 계속 호주머니에 손 넣은 채로 무표정한 얼굴로 입맞춤하다가 여자의 얼굴에서 금세 멀어지더니, “ 가. 이제” 라고 툭 던졌다. 키스에 곧바로 안녕이라. 개방적인 작별 인사라고 하기엔 너무 진하고, 감정이라 부르기엔 너무 건조했다. 와씨, 요즘 얘들 연애 한 번 세련됐네. 그들의 실루엣은 복자의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를 띄우게 만들었다.


그 때,


“ 알고, 이게 누구냐? 복자냐?”


크르릉 거리는 시동 소리가 켜지면서, 트럭 앞 창문으로 배추 아저씨가 얼굴을 내밀었다. 목소리가 좀 작아야지, 놀란 복자가 똥그래진 눈으로 스포츠카 앞에 우뚝 서있는 제이와 눈이 딱 마주친다.


압.

씨.

쪽팔려.


“ 복자야!!복자야!! 복자 맞지?? 거기 왜 숨어있냐?”

‘ 오- 마- 이- 갓.....’


트럭 뒤에 환하게 빛나는 시뻘건 브레이크 등 덕분에 안 그래도 민망한 얼굴이 새빨개졌다.

“ 아... 아저씨... ”


간신히 달달거리며 입을 떼긴 떼는데 정말 이대로 사라지고만 싶은 심정이다. 누가 여기서 나 기절 좀 시켜줘라...


“ 복자- 너 배~추 필요하냐?~”

“ 아하하하하~~ 제가요? 배추요?”

“하하하, 우리 복자가 배추를 많이 좋아하네잉~ 아저씨가 몰랐다잉~ 담에 배추 필요하믄 말혀~ 알았제~ 복자야~? 복자 이름 참 좋아잉~ 복자, 복자~ 그럼 아저씨 간다잉~”


이 동네에서 목소리 크기로 두말하면 서러운 배추 아저씨는 그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려 열 번이나 ‘복자’라는 이름을 확인 사살해 주셨다. 고마워서 피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배추트럭도 떠나고, 콜린 퍼스도 울고 갈 새빨간 스포츠카도 떠났다. 복자와 제이는 골목길 끝과 끝에서 서로를 쳐다보며 서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 그래 세라믹 철판이다. 복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옆에서 큭큭 거리며 웃는 제이 바로 옆을 지나쳤다. 기깔나는 스포츠카 옆에서 목각인형 마냥 굳어있던 얼굴이 금세 개구쟁이로 변해버렸다. 안들린다, 안들려. 저 비웃음 소리 하나도 안 들린다.. 복자는 이로 입술을 꽉 깨물면서 간신히 집 앞까지 도착했다.


그 때, 대문이 벌컥 열리면서 아버지가 급하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 아 놀래라.”

“ 어, 복자야~ 알고 제이군도 왔네~”


복자 뒤편으로 따라오던 제이도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뭔가 아버지의 어둠침침한 안색에 경고등이 켜졌다.


“ 아부지, 왜 그래.”

“ 응응, 아니. 별일은. 이제 밥 먹고 슈퍼 가려고. 저녁 장사 해야지... 근데 복자야, 오늘 집에 영미엄마 왔다갔다. 또 너희 엄마 속 뒤집고 갔어. 청첩장 주고 갔거든.”

“ 아~~ 그래.. 난 또 뭐라고~ 걱정마~ 아부지...”


복자는 최대한 밝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그건 경고등이 아니라 비상벨임을 곧바로 감지했다.


영미 엄마.

이영미 ....

복자네 동네 학부모들의 모범답안 같은 ‘딸’이다.

신화적 존재다.

모든 동네 아이들의 표적이자,

몽둥이찜질의 원흉!!

영미 엄마가, 시장 바닥을 한 번 뒤집고 가면 그 날 동네 아이들 줄초상 났드랬다. 공부면 공부, 미모면 미모, 취업이면 취업. 이제는 ‘결혼이면 결혼까지’ 전 분야를 석권했나보다.


“후” 하고 길게 심호흡을 내뱉으며 전장터, 아니 집 안으로 발이 들이미는 복자. 그 얼굴이 사뭇 웅장해서 뒤에서 싱글거리던 제이도 입가를 굳게 다물었다.


-징---잉


때마침 제이의 호주머니에서 폰이 울렸다.


“ 여보세요. 아~ 영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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