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이야기
1990년 12월 3일 03:37
시퍼런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위에는 별빛이 쏟아지고, 아래는 은빛 파도가 반짝인다.
그 한가운데 조각배가 떠 있고, 안에는 잠옷 차림의 여자아이 하나가 있다.
아홉 살, 아성이다.
작은 얼굴에 동그란 눈과 코는, 유선을 많이 닮았다.
아성은 몸을 약간 일으켜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푹신할 것 같은 희뿌연 물안개만이 사방에 깔려있다.
그 안개 속에 대체 무엇이 숨어 있을까?
아성은 두 손으로 배의 난간을 힘주어 꽉 잡았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어디야?’
아성은 입을 크게 벌려 엄마를 불러보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아성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언제나 아성에게만 다정한 치원 삼촌도
목소리가 있지만, 자신에겐 목소리가 없었다.
그 때였다.
조각배 뒤쪽에서부터 불편한 진동이 느껴졌다.
잔잔하게 움직이던 파도의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성은 몸을 납작하게 낮춘 채 배의 꼬리칸 쪽을 바라봤다.
물 아래 거대한 무언가가 재빠른 속도로 조각배가 있는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 쑤아아아악....추우우울렁
조각배 뒤쪽이 위로 솟구치더니 가라앉고 가운데가,
그다음 윗부분까지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며 파도를 탔다.
성난 뱀처럼 요동치는 배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성은 이를 꽉 물고 안간힘을 다해 매달렸다.
손바닥만한 조각배 따위야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것 같은 파도가 일순간 멈췄다.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고 있던 아성은 용기를 내어
배 밖을 건너보았다.
거짓말처럼 잔잔해진 수면 위로
둥그스름하고 반질하게 빛나는 검은 물체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가장 화려한 검정색으로 감싸진 무언가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반드러운 피부에 박혀있는 두 개의 눈동자가 아성을 향해 있었다.
몸을 천천히 일으킨 아성은 아직도 진동이 남아있는 배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 혹시... 고래? 고래!!... ’
그래.. 고래...
아성의 눈과 고래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태초에 태어난 생명체의 눈동자.
달처럼 빛나는 구슬.
‘ 아... 너무...예쁘다...’
아성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여 입이 벌어졌다.
수면 위로 보이는 고래의 눈은 깜박하지도 않은 채 아성을 오랫동안 탐색했다.
사방은 다시 고요하고, 들리는 소리라곤 이것뿐이다.
아성의 거친 숨소리와 고래의 얼굴을 잔잔히 간질이는 파도소리.
“ 너구나.”
아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뭐지? ’
사람의 말소리였다.
그게 가능한가?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아성과 물속에 잠긴 고래뿐인데.
배 한가운데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아성을 향해 똑같은 소리가 다시 들렸다.
“ 바로 너구나.”
좀 더 정확하고 큰 소리였다.
아성은 놀란 눈으로 바로 앞의 고래를 바라보았다.
‘ 너야? 너가 말한거야?’
수면 위로 살짝 올라온 고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성은 마음 속으로 물었다.
“ 그래. 내가 말한 거야. 이곳엔 너와 나 둘 뿐이잖아.”
이번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똑똑하게 아성의 귀에 들렸다.
고래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 어떻게? 고래가 말을 할 수 있지?’
“ 당연히 우리도 말을 해. 인간들이 그걸 들을 수 없는 것뿐이야.”
아성은 균형을 잡아 배의 앞머리까지 걸어와 고개를 빼꼼히 난간 밖으로 내밀었다.
‘ 근데 이상해... 너는 내 생각이 들리니?’
“ 물론. 바로 너처럼.”
순간,
- 후우우우
따뜻하고 보드라운 바람이 아성을 얼굴 위로 불어와
머리카락과 입고 있던 잠옷이 펄럭거렸다.
그것은 찝찌름하고 축축한 바닷바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아성의 얼굴에서 두려움을 멀리 날려 보냈다.
‘ 기분이 편안해. 이젠 무섭지 않네.’
아성은 고래를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장난을 걸었다.
그러자,
- 퓨우우욱 퓨우우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숨구멍에서 물방울들이 분수처럼 솟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달빛에 비친 물방울들은 영롱하게 빛을 발하며 하늘 위로 튕기듯이 날아올랐다.
아성은 동그란 눈을 감았다 떴다.
고래는 사라지지 않고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 이건 꿈이지?’
아성은 몸을 밖으로 쭉 내밀고 고래의 검고 축축한 살결 위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고래는 순한 강아지마냥 가만히 있는 채로 답했다.
“ 그럼..”
‘ 역시, 꿈이었어. 꿈이니깐...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고래와 말하는 게.. 꿈에서 깨어나면 고래도 사라지고,,, 원래대로 돌아 갈거야...’
아성은 고래를 만지는 손을 거두었다.
그 모습이 조금은 실망한 것처럼 풀이 죽어 보였다.
“ 나는 누구와도 말할 수 있어. 꿈이 아니라도.”
‘ 꿈이 아니라도?’
“ 그래, 꿈이 아니어도.
‘ 어떻게? 너는 그냥... 고래잖아.’
“ 그냥.. 고래니깐. 우리는 주변의 모든 소리를 듣고, 어떤 것이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 소통할 수 있어.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어.”
‘ 어떻게? 그게 가능해? 마술 같은 거야?’
“ 마술..... 과도 비슷한데... 그런데 우린 그걸... 멜론이라 불러. 멜론.”
‘ 멜론?’
“ 응. 멜론. 우린 멜론을 통해 주변의 생각을 읽어내고 그 안으로도 들어갈 수 있어.”
아성은 눈을 감은 채 두 개의 집게손가락을 머리 양옆에 갖다 대었다.
잠시 후엔, 머리 옆에 갖다 댄 손가락을 떼어 내고 ‘후’하는 입모양으로 한숨을 내셨다.
‘ 아무리 상상해보아도 떠오르지 않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거... 어떤 기분일까? ’
“ 넌 상상할 필요 없어.”
‘ 후, 그렇지. 난 말도 못하니깐.’
“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이제부턴 너도 할 수 있을 테니깐.”
‘ 뭐? 내가? ... 어떻게? ’
아성의 눈과 입이 더할 수 없게 커다랗게 벌어졌다.
“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보라구...”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고래는 수면 아래로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숨겨 버렸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고요함이 얼마간 이어졌다.
아성은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려서 가슴팍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이 일이 벌어졌다.
물보라가 아래에서 위로 쏘아올린 화살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쏟아지더니
양 사방으로 물거품이 일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산 하나를 뿌리째 뽑아 들어 올린 거대한 대왕귀신고래가 솟아올랐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장면이다.
아성은 쏟아지는 물보라에 온 몸이 홀딱 젖었다.
파도는 거셌고, 조각배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요동쳤다.
고래의 뱃가죽이 강하게 바다의 물살을 내리치고,
굉장한 양의 물보라가 아성과 조각배를 그대로 덮쳐 버렸다.
아성은 제대로 숨을 쉴 수도,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입을 벌리고 헉헉 대고 있을 찰나에,
바로 앞 고래가 머리부터 몸통, 꼬리 끝까지 헤엄치듯
아성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회오리치듯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경기하듯 요동치던 바다는 거짓말처럼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마술처럼 신비스러운 장면이었다.
“ 고래가 ...내 안에.. 들어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