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세번째 이야기
야트막한 녹색의 언덕 뒤로 W호텔의 정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헬기에서 내려 우성과 함께 도착한 곳은 글램핑 빌리지였다. 빌리지는 헬기 착륙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5분 정도 거리를 걸어오는 내내 우성은 복자의 손을 놓지 않았다.
탁 트인 배경으로 호텔 반대편에는 제주 바다의 특유의 청량함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비자나무가 둘러싼 숲 안에 고급스러운 카바나 스타일의 대형 텐트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복자는 황홀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 우와, 여기 완전 좋네요. 숲속의 비밀 공간 같은데요.”
우성은 천천히 뒷걸음치며 복자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계속 바라본다.
“ 복자씨가 정확히 봤어요. 숲속의 비밀 공간. 그 컨셉이에요. 여기.”
“ 그런데.. 주변에 사람이 없네요. 평일이라 그런가?”
복자는 그제야 이곳에 자신과 우성만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머진 바람과 새소리뿐이었다.
“ 아직 오픈 전이에요. 그러니까.. 복자씨가 첫 손님이죠. 창립 55주년 기념식 날 오픈합니다.”
“ 와이... 이야. 영광인데요. 이거 정말.”
잠시 멈춰 서서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풍경을 둘러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 크. 이런 말 하면 웃긴데, 안 믿겨요.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거. 뭐랄까? 음... ”
바다 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복자가 입고 있던 카키색 코트 속 검은색 플리츠 스커트가 펄럭거렸다.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재잘거리는 복자를 우성은 빤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여자의 입술 주변에 달라붙은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서 귀 뒤로 넘긴다. 그녀의 뺨과 귓가 주변으로 따뜻한 촉감이 살짝 다였다가 안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잠깐의 정적을 깨고 복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뒷말을 이어나가려하는 찰나에,
“ 음... 그러니깐 이상한 나라의 엘..”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우성은 복자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 살포시 그녀를 껴안았다. 여자가 있는 쪽으로 두 발자국 걸어간 것이다. 고작. 그렇지만 우성은 온 우주를 당겨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자신을 온전히 보내버렸다.
그리고 여자를 안았다. 포옹했다. 그녀의 우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복자의 뺨 위로 부드러운 섬유의 질감이 살짝 스치더니, 단단하고 넓은 가슴팍이 닿았다. 그리고 얼떨떨하게 못다한 말을 마쳤다.
“엘리스 같네요.. 현실감이 없어요.”
복자의 머리 위로 “크”하고 저음의 웃음이 터졌다. 품 안에 안긴 복자는 우성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만 할 뿐, 볼 순 없었다. 그편이 다행이다. 복자의 귓가로 우성의 심장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한없이 차분하고 진중해 보이는 남자의 심장은 농구공이 튀듯이 쿵쾅거리고 있다. 소리는 진동을 만들고 그 울림이 복자의 마음속까지 퍼졌다.
우성의 따뜻한 두 손이 그녀의 머리를 조심히 감쌌다. 그리고는 정수리 위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짧은 순간, 경쾌하게 입 맞추는 소리가 울렸다 사라졌다. 복자의 눈이 잠시 커진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 그럼 난,,, 시계 토끼? 모자 장수? 둘 중 뭐죠?”
아, 손발이 오그라들 거 같으면서도 한 편으론 상당히 간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는 애초에 포기한 복자는 잠시 고민하다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바람이 차요, 어서 들어가죠.”
좋고 멋진 걸 떠나 일단 우성은 배려가 기본으로 깔린 사람이었다. 몰론 그가 자신에게만 그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속상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우성은 복자의 손을 다시 마주 잡고, 제일 왼쪽 끝에 있는 큰 카바나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베이지색 톤의 텐트 안은 근사했다. 우와, 또 한번 탄성이 터져나왔다. 클래식한 전축, 장작이 타고 있는 벽난로, 작은 콘솔 위에 쌓아 올린 책 몇 권들, 넓은 테이블과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푹신한 소파, 은은하게 퍼지는 팬던트 조명과 비틀즈의 hey jude...
텐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디귿자형의 소파 뒤로 복층과 연결되는 난간이 있었다. 그 난간으로 올라가면 위층에는 아이보리색 시트로 감싼 매트리스와 바닥에는 알록달록 퀼트 까펫이 포근하게 깔려 있었다. 그 곳은 누구나 상상해본 적 있는 꿈속의 다락방이었다.
복자가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구경하는 중에 밖에서 안으로 음식들이 도착했다. 그린 아보카도색 점퍼를 입은 두 명의 호텔직원이 격식 있으면서도 재빠른 동작으로 음식을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저절로 향기에 눈이 감기는 버섯크림스프와 패스츄리, 상큼한 유자드레싱이 뿌려진 대하 콥 샐러드, 미니당근과 루꼴라로 장식된 스테이크, 어른 주먹크기 만한 전복과 새빨갛게 익은 바다가재....
복자의 두 눈에 빛이 반짝이고, 침이 저절로 삼켜져다. 빙긋이 미소 짓던 우성이 복자를 소파 쪽으로 끌어 앉히고, 자신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직원이 마지막으로 세팅한 레드 와인을 투명한 와인잔에 따르며 말했다.
“ 트리오 쇼비뇽이 빠질 수 없겠죠? 배고플까봐 그냥 한꺼번에 다가지고 오라고 했어요...”
쇼비,,,뇽? 뭔 뇽? 암튼 뭐, 맛있는 음식이 바로 눈앞에 들이치자, 복자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헬기에서 내리고 나서 죽 정신이 차려지지 않아 잠시 잊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식사였다. 두 사람은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소파에 기대어 따뜻한 주황빛을 발하는 벽난로 안을 바라보았다. 복자의 에스프레소 위에는 하얗고 달달한 크림이 올라가 있다.
“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요. 나 두 시간 전만 해도... 서울 한복판 사무실 안에 있었는데... 지금 여긴 정말 천국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되네요..”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달리 텐트 안은 아늑하고 따뜻한 공기로 차 있었다. 달뜬 표정을 짓고 있는 복자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우성의 눈빛이 그윽하다. 그는 에스프레소 잔을 마시면서 다른 한 손으로 복자의 손을 깊숙이 잡았다.
“ 나도...그래요..”
우성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 복자씨랑 같이 있으면. 늘.”
두 사람의 시선이 가운데서 마주쳤다. 뜨겁기보다는 감미롭고 포근했다. 텐트 안 공기처럼.
그리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우성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고 복자의 이마 위에 입술을 살며시 갖다 댔다. 입술에 닿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아래로 감긴 복자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가슴의 떨림보다는 약했다. 복자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던 수많은 질문과 걱정들이 싹 지워졌다.
우성의 입술은 그녀의 이마에서 조그마한 콧등 위로 내려왔다가 잠시 머물렀다. 감겨있던 복자의 눈이 살며시 떠졌지만,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칠 순 없었다. 그는 입술을 떼고 그윽하게 복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쇼비뇽에서 나던 체리와 블루베리의 짙은 과일향이 맡아졌다.
“ 나... 당신이 좋아요.. 무척이나..”
복자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본다.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믿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 아무 이유 없어요. 그냥. 처음부터 그랬어요.”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다짐하듯 우성은 말했다. 선명한 고백이었다.
그제야 깊게 한숨을 내쉬는 복자의 입술 틈으로 우성의 입술이 과감하게 다가와 부딪쳤다. 두 눈을 감은 우성은 복자의 살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노크하듯 두드렸다. 자연스레 열린 여자의 입술 안으로 남자는 부드럽고 유려하게 들어왔다. 서두르진 않았지만,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느 시인이 말했듯, 꽃잎이 서로 부딪치며 이뤄지는 죄 없는 입맞춤처럼 아름다웠다. 기분 좋게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주변을 채웠고, 그 특유의 아늑함은 두 사람을 더욱 서로에게 빠져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