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번째 이야기
따뜻하긴 한데, 설핏 낯선 기운이 들었다. 침대 왼쪽으로 치우쳐 누운 복자의 눈이 떠졌다. 그녀의 몸 위로 푹신한 크림색 이불이 목까지 올라와 있다. 마치 누군가가 조금 전까지 그녀의 자는 모습을 살펴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똑똑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노란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가 들어왔다.
“어?”
그녀는 침대 위에 몽롱하게 앉아있는 복자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문밖으로 나가 호수를 확인한다.
“ 1309호 김복자 환자분 맞으시죠? 여긴 1307호인데... 여기 있던 남자 환자분 어디 가셨어요?”
간호사의 통통 울리는 목소리에 그나마 남아있던 졸음이 확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한 복자가 두리번거리며 작게 중얼거린다.
“ 그러게요.... 그 남자... 어디로 갔을까요? 대체....”
제이의 병실에 홀로 남겨진 복자. 몇 시간 전의 키스가 떠오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다가 황당해진다. 말없이 사라진 그도, 여기서 잠들어버린 자신도, 어제의 그 키스도 모두 황당하다.
몇 번이나 핸드폰을 집었다가 놓았는지 모른다.
핸드폰이 이상한 게 아닐까?
이 병원 벽이 너무 두꺼워서 전파가 터지지 않는 게 아닐까? 이따위 유인원 같은 생각을 하면서 복자는 수차례 핸드폰 전원을 끄고 켜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무 연락도 없었다.
제이에게서는.
의문은 걱정이 되고, 걱정은 불안이 되었고, 그 불안은 다시 분노로, 분노는 확신으로 끝맺었다.
“ 미.친.놈.....”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새벽과 홍 양, 고 팀장이 병문안을 왔다.
환자가 환자를 병문안 오는 게 말이 되냐며 새벽은 툴툴거렸다. 조용하던 병실이 복작복작해지자 가라앉으려는 기분이 나름 괜찮아졌다.
그리고 우성은 완벽한 슈트 차림으로 커다란 꽃바구니에, 서점을 털어서 온 건지 갖가지 책들에, 마카롱 세트를 포함해 백화점 지하 1층 코너를 긁어다 병실 안으로 가지고 왔다. 그는 성탄절 전날 밤의 양복 입은 산타클로스 같았다. 기대에 찬 얼굴로 잠든 복자의 양말 안에 불록하게 선물을 구겨 넣고 가는 사람.
이 실장은 한아름 들고 있던 꾸러미를 놓고, 복자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자신을 보급형 마동석이라고 딱딱하게 농담을 던진 이 실장 덕분에 어색한 인사가 웃음으로 끝맺었다. 그런 그가 복자 앞으로 앙증맞은 마카롱 세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모습은 마치 뭐랄까... 추파춥스 껍질을 조심스레 벗겨내는 수컷 고릴라를 떠오르게 했다.
“ 먹을 게 너무 많은데... 여기서 한 달은 거뜬히 견디겠는데요...”
얼떨떨해하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살아온 세월 동안 남자에게서 이런 보살핌은, 사실 처음이다. 융숭한 공주 대접이 영 어색한 건 사실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좋은 건 알겠는데, 좋다고 두 발 뻗고 맘 편하게 다 내려놓을 만큼 해맑은 성격도 아니다. 자기 비하까진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 하는 그런 유형의 인간은 절대 될 수 없는 종자다. 김복자는.
이 실장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툼한 두 손으로 노란색 마카롱을 살포시 두 조각내서 한 조각을 입 안에 쏘옥 넣으며 말했다.
“ 아~ 쪼개서 먹으면 두 달은 더 견딥니다...”
그 모습을 보고 복자와 우성 모두 웃음을 터졌다. 이 실장도 따라 웃었다. 그가 웃으니 작은 눈이 실처럼 얇아졌다. 세상에서 제일 작고 불쌍한 마카롱 같았다. 괜찮다고 다른 사람한테 억지로 보여주는 것 말고 진짜 웃겨서 편안히 웃었다. 웃다가 우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줄곧 이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던 거 같다. 정제된 매너를 기본으로 두던 그가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하니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만약을 붙여본다.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까지 혼자서 해버린다.
당신이라면 한밤중 나와 키스하고 난 후에 누구처럼 말없이 사라지진 않겠지?
그때, 우성이 복자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한 손으로 입가에 묻은 분홍색 설탕 가루를 떼어주었다.
두근.
두근.
복자는 자신의 음란한(?) 상상이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단맛이 입 안에 퍼지고, 정신까지 몽롱하게 만들어 버린 걸까? 우성의 손이 복자의 얼굴 한쪽을 감싸다가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잠시 눌렀다.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눈빛만은 전혀 조심스럽지 않았다. 너무나 노골적이고, 무례했다.
그때, “ 아! 여보세요. 네네..” 이 실장이 급하게 전화를 받으며 병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너무 가짜 같잖아. 이 실장님.... 억지로 꾸며낸 퇴장 연기는 남아있는 두 사람을 더욱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다음 날, 복자는 혜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닥터마틴의 검고 단단한 부츠가 보였다. 제이의 신발이었다. 그가 집 안에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이 곳에 있었다.
결국 아무 일은 복자에게만 있었던 것일까?
어슴푸레한 새벽에 눈이 내렸고
분명히 남자와 여자는 따뜻한 입맞춤을 나눴었는데...
복자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방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마치 맡겨놓은 무언가를 당당히 받아야 할 사람처럼. 뒷모습이 보였다. 화면을 보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제이. 침묵 속에 리드미컬한 타이핑 소리만 둥둥 떠다니다 뚝- 멈췄다. 그리고 매우 게으르고 귀찮은 속도로 뒤돌아 말했다.
“ 나 지금... 일하는 중인데. 뭐 할 말 있어요? 급하게?”
제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있어요? 있어요? 그 존댓말은 또 뭐고?
낯설고, 다시 봐도 낯설었다. 뭔가 말해야 하는데, 분명 자신은 말할 게 한 가득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벽돌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새하얗다.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
“ 왜요? 뭔데요?”
귀찮다는 말투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의자에 앉은 채 그는 일어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좀 나가달라.... 복자는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말했다.
“ 미.안.하.게. 됐네요. 방해해서.”
복자는 있는 힘껏 방문을 닫아버렸다.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것이었다.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헛-” 어이없게 웃음이 나온다. 그러더니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올라왔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복자는 아무 신발이나 구겨 신은 채로 현관문을 박차듯 열고 밖으로 나갔다. 뛰듯이 걸으며 중얼거렸다. 남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든 말든.
그래 좋다. 오늘 이 동네 미친년은 나다.
“ 뭐야. 지금... 나.. 나 가지고 장난하거야? .. 핫, 아니면 진짜 꿈이야?.. 아니지, 그럼 내가 그 침대에서 일어났을 리가 없지....왜요? 왜요? 하하하핫핫, 하하하하..아 씨발.. 아 웃겨.. ”
차가운 바깥 공기를 쐬니 조금씩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웃음도 멈췄고, 어디쯤에 서 있는지 주변도 돌아보게 됐다. 동네 놀이터 부근이었다. 복자는 아래 위 두툼한 회색 츄리닝에, 진한 카키색 크록스를 신고 있었다. 아버지 것이었다.
“ 참... 나.. 진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다 나네. 정말....”
복자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를 끌어당겨 닦았다. 그리곤 어딘가를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 양아친 줄 알았더니.... 너 쓰레기였구나. 완전 개 쓰레기.. 내가 다시 너랑 상종하면 정말 개.미.친.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