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번째 이야기
특실의 병실 침대는 푹신하고 편안했지만, 쉬이 잠은 오지 않았다. 분홍색 슬리퍼를 끌고 복자는 병실 밖을 나섰다. 절대 안정이라는 붉은색 글자가 휘몰아친 하루의 결과물처럼 보였다.
조도가 낮은 병원 복도 한 켠에 기대어 맞은편 병실 근처를 서성거렸다. 제이의 상태는 그리 심각한 건 아니라고 전해 들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걸 봤는데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벌컥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의 상태를 확인할 만큼의 대범함도 자신은 가지지 못했다.
그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병원 복도를 배회하며 복자는 복잡한 머릿속을 하나씩 정리해간다. 자꾸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우성의 존재도 걱정의 한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
민우성.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유형의 사람이다. 그런 유형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 은하계 어디쯤 사는 외계인과 동급이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품었다간, 그 날로 자신은 가장 불쌍한 지구인이 되고 말 거다.
“ 아 씨 몰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돌리다가 턱 아래로 찌릿한 고통이 몰려왔다. 꿰맨 자국이 따가웠다. “아..”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드르르륵
그때, 맞은 편 병실 문이 열리고 짙은 밤색 카디건을 입은 노신사가 복도 밖으로 나왔다. 복자의 얼굴에 반가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일었다.
“ 고영감님.”
“ 아, 김대리!”
잘생긴 남자 아이가 뒷좌석에 앉아 곰 인형을 안고 창밖 풍경을 내다본다. 커다란 아몬드 모양의 갈색 눈동자 위로 울창한 벚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꽃잎이 눈처럼 날린다.
“엄마, 지금 겨울이야? 봄이야?”
엄마가 뒤돌아 상냥하게 답한다. 남자 아이와 그녀의 갈색 눈이 닮았다.
“ 몰론 봄이지. 벚꽃이 폈잖아.”
“그런데 꽃눈이 내리네. 그러니깐 지금은 봄이 겨울이랑은 헤어질 준비가 안 된 거야. 그렇지?”
엄마, 아빠의 눈이 잠시 마주치고, 아들이 너무 귀여워 어쩔 줄 모른다.
“우리 아들, 너무 멋지다.”
엄마는 벚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뒤돌아 아들을 본다.
그런데, 그녀 뒤에 유리창으로 거대한 트럭이 보인다.
트럭은 너무 컸고, 너무 가까웠고 급기야 차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 때부터 모든 게 느린 그림이다.
제기랄.
잔인할 정도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이 뚜렷하다.
유리 조각이 벚꽃처럼 뿔뿔이 흩날렸고, 벚꽃보다 붉은 색이었다.
웃고 있던 예쁜 엄마 얼굴이 그대로 툭 떨어져 정면으로 부딪혔다.
어떻게 사람 얼굴이. 저렇게 툭.
목이 떨어져나간 자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샘솟았다.
축축했다. 벌겋게 핏물을 뒤집어쓴 나.
축축하다가 점점 찐득해졌다.
꿈이 아닐까?
이건 피가 아니라 토마토 주스는 아닐까?
꿈이다. 상상이다.
제발 누구든지 말해줘.
진짜가 아니라고...
“...제발...제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제이, 그의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나쁜 일들은 언제나 쉼 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무슨 일이야? 얼마나 나쁜 꿈을 꾸길래...”
복자가 중얼거리며, 그의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그를 오랫동안 봐왔다는 고영감의 설명이 다시 떠올라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은 끔찍한 사고로 제이는 지금도 간혹 PTSD에 시달린다고 했다. 옆구리에 칼이 찔렀는데도 흔들림 없던 그가 내 턱 아래에서 피가 흘러내릴 때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것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우연히 알게 된 그의 한 조각이 복자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아이처럼 울고 있는 남자.
안쓰러웠다.
제이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흐릿한 달빛이 오뚝한 남자의 콧날을 스쳐 지난다. 그 모습은 앞뒤 맥락도 없이 복자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내가 이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나, 아님 전혀 모른다고 해야 하나... 둘 중 그 어느 것도 아닌 애매한 사람이었다. 복자는 제이에게서.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그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남자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연신, 뜨거운 물줄기가 베개를 적셨다.
궁금해진다. 이 남자가. 이 사람이.
너에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니?
너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니?
물음이 또 다른 물음을 가지고 온다. 어정쩡한 거리로 떨어져 쭉 손을 뻗어 눈물을 휴지로 닦아주던 복자가 좀 더 가까이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보드라우면서도 공기를 울렁이는 그런 기분이 느껴졌다. 잠든 아기의 뺨을 쓰다듬듯이 복자는 남자의 얼굴을 손등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생각보다 보드라운 촉감이 좋았다.
천천히 눈을 뜨는 제이. 기다란 속눈썹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아직 몽롱함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코 앞에 누군가의 숨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자신에게 멀어지려는 그 동그란 두 눈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보았다.
이것도 꿈인가.
두 사람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거리에서 제이는 멈추었다. 여자는 약하게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숨소리도.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 두근거리는 소리가 입자처럼 공기 속을 어지럽게 떠돌았다.
누구의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제이는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살짝 내밀어 자신의 두 손에 가둬진 입술 위로 살짝 입을 맞추었다. 상냥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떼어내고, 여자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촉촉하게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 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여자의 양 볼을 감싸고 있던 한 손을 목덜미에,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여자의 얼굴을 감싸며 다시 입 맞췄다. 이번에는 더 깊고 감미롭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손이 제이의 팔을 천천히 감싸 잡았다. 제이는 여자의 손이 맞잡은 자신의 몸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반응들에 놀랐다.
이게 옳고 순서가 맞는 일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계획했던 일련의 과정들이 복잡해지겠지.... 머릿속 복잡한 퍼즐이 하나 둘 뒤엉켜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그만. 멈춰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입맞춤을 멈추기 싫었다.
여자의 달콤하면서도 따뜻한 냄새 때문인지,
진짜 나를 보여주는 그 동그란 눈 때문인지,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을 떠올린 빌어먹을 꿈 때문인지,
.....
아니면, 처음부터 이유 없이 이 여자와 키스하고 싶었는지.
병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짙은 회색빛 밤을 배경으로 조용하게 내리는 그 해 겨울의 첫 눈이었다. 단단하지도 않고 질퍽하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계속되었다. 눈송이는 천천히 내려와 쌓이기 전에 녹아 버렸다. 두 다리가 흔들리는 복자를 제이는 자신의 곁으로 안아 올렸다. 복자의 눈이 다시 천천히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