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번째 이야기
내게도 이런 경험이.
이런 장면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복자에게 있어 오늘 밤의 소동은 마냥 꿈만 같다.
일상은 지루할 정도로 비슷했다. 순서만 조금씩 바뀌고, 몇몇 사람만 바뀌는 정도였다. 한 마디로 그게 그거, 쳇바퀴, 무한반복. 일도 그랬고, 가뭄에 콩 나듯이 했던 연애도 그랬다.
지하철을 타고 혹은 버스를 타고 출판사 안으로 들어가 이런저런 원고들을 읽고, 글자를 고친다. 때때로 작가라는 사람들을 만난다. 회사 사람들과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실없는 농담을 나눈다. 그러고 나서 밥을 먹는다. 커피를 마신다. 타이핑을 한다. 나도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늘 생각뿐이다.
작가?
그런 건 아무나 하나? 시간이 지나면, 어쩌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다음을 기약한다. 그러고선 다시 지하철을 타거나 혹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기분이 가라앉는 날에는 남의 sns를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나 빼고 바쁘게 잘만 살아가는 친구나 지인들을 보면, 그날은 무덤 파고 들어가야 해서 되도록 조심한다. 대체로 넷플릭스에서 볼 것을 훑거나 그마저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은 먹방을 틀어놓고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참 잘 먹네. 좋겠다. 맛있는 거 먹고 돈도 벌고.
타인의 삶을 훔쳐보다가 아무 영양가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렇게 비슷비슷한 매일의 일상을 넘겼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되었을 오늘.
죽지 않았다면, 죽고 싶을 만큼의 나쁜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던 오늘.
그러나 다행히 죽지 않았고, 끔찍한 일도 피해간 오늘.
그래서 복자는 눈을 감고 있는 지금도... 궁금해진다.
제이는 어떻게 됐을까?
감은 눈 위에 쏟아지는 강렬한 형광등 불빛들과 소독 냄새, 주사바늘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따끔거림, 낯선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그리고 익숙한 이들의 목소리. 엄마 그리고 아버지.
딱딱한 침대에서 어딘가로 옮겨져 푹신하고 편안한 시트가 느껴진다.
쾌적하고 조용한 장소.
눈을 떴다.
연한 베이지색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
11시 55분.
오늘보다 더 긴 하루는 자신이 인생에 더는 없을 거라고 복자는 생각했다.
“ 복자야!! 괜찮냐??”
“ 알구 우리 딸.... 이제 정신이 들어?”
아....
우리 가족....
복자는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장이 멎을 만큼의 일이 벌어졌지만, 애써 내색하고 싶진 않았다. 해드린 것도 없는 부모님한테 그런 걱정까지 끼치고 싶진 않았다. 나보다 더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목 주변이 강하게 쪼이는 느낌 때문에 어색하게 웃는 표정이 꽤 어색했다.
“ 어..엄마..걱정했지?”
“ 쯧, 말하지 마. 목 더 아프다. 심각한 거 아니래. 다행히. 빨리 발견이 되고 응급처치도 잘 돼서..”
“ 이런 씨불할 것들....”
평소에 욕 비슷한 것도 안 하시는 착한 우리 아부지....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눈가가 뜨끈해졌다.
“ 괜찮아. 나...”
“ 그래그래.. 이만하면 다행이야. 아이고.”
그렇게 억척스러운 엄마 눈에서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더니 꺽꺽 울음을 삼키셨다. 푹 꺼진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여과 없이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서 보니 우리 엄마 나이 든 게 다 보였다. 침 삼키는 게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굵은 침을 삼켰다. 어? 병실 뒤쪽 벽에 서 있는 남자, 우성을 그제서야 발견했다.
“ 알고! 내 정신 봐라.”
복자 곁에 서 있던 아버지가 손짓하며 뒤에 서 있던 우성을 불렀다.
“ 복자야, 저분이 너 병원까지.... 우리한테 연락도 바로 해주시고... 감사 인사 백번을 드려야 해,,,, 너 깰 때까지... 기다린다고 ... 거기다 이 넓은 특실을...”
고마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버지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복자는 우성과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늘 반듯한 느낌을 주던 우성의 얼굴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목 주변의 단추가 몇 개 풀어져 있고 하늘색 셔츠가 구김이 가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 얼굴도 까칠해 보였다. 그 덕에 안 그래도 깊은 눈이 더 깊어 보였다.
“ ... 괜찮아요? 복자씨?...”
이전에도 우성의 목소리는 가볍진 않았지만, 오늘따라 더 무겁게 들려왔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엄마가 요상한 표정과 동작으로 아버지를 불러 끌다시피 병실 밖으로 나가셨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다. 엄마는 아마.... 민우성이 마음에 꽤 들었던 모양이다.
“ 네.. 정신 완전히 잃기 전에 우성씨 본 것 같아요.”
복자는 병원으로 실려 오기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엉망이 된 사무실. 동네 불량배의 팔에 갇혀서 턱 끝을 누르던 칼날, 그런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던 갈색 눈,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정리된 장면 다음에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쓰러진 제이가 있었다. 제이....
“ 저 말고 같이 실려 온 남자는요? 그 사람도 분명 다쳤는데..”
“ 아... 그 사람도 여기 입원해 있어요.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상처가 깊진 않다고 하네요. 물론 아무렇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나는.”
우성의 설명에 복자의 얼굴에 비친 걱정스러움이 옅어졌다. 우성이 복잡한 얼굴로 잠시 바닥을 보다가 팔짱을 낀 두 손을 풀며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흐트러진 머리칼만큼이나 움직임도, 말투도 평소의 우성과는 차이가 있었다.
“ 그런데? 어떻게 아시고? 거기 오셨어요?”
“ 아... 전화로 들었어요. 복자씨 전화가 켜져서. 그 소릴 듣고..... 미안해요.”
“ 뭐가요?”
자신한테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복자가 우성을 올려다보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부모님 설명대로라면 그가 여기 병원 입원까지 도움을 준 거 같은데. 사과를 할 게 아니라 감사의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까부터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뜬금없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복자의 침대와 우성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반듯한 입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열렸다.
“ 미안해요. 내가. 더 빨리 갔어야 했는데. 그래서 너무 미안해요.”
잠시 복자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우성의 말이 병실 공기 중에 흩어져 어지럽게 떠돌아다녔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거 같았지만, 복자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모르겠다.
그냥, 모르겠다.
복자는 같은 말을 계속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