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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Aug 27. 2024

22. 기대했던 것이,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스물 두번째 이야기 

   

   


문이 닫히고복자는 가버렸다방 안엔 침묵만 남았다리드미컬한 타이핑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하얀색 윈도우 화면은 해석이 불가능한 요상한 문자들만 가득했다아무렇게나 자판을 두드려 만든 흔적뿐이었다.     


 휴후-”      


방금까지 차갑게 얼어있던 그의 얼굴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쓸쓸해 보인다깊은 한숨을 토하며제이는 책상 위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     


우렁차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가 들리자그는 전기에라도 감염된 것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으로 따라 나가려 했다그러다 문잡이를 잡은 그의 손이 멈췄다파랗게 힘줄이 보일 만큼 힘주어 잡았지만밖으로 따라 나갈 수 없었다     


 “돌아버리겠네씨발...”           


다만거칠게 그의 머리를 쓸어내리면서 그대로 방문 아래로 주저앉는다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그는 홀로 남았다          



     


(이성그룹 홍보팀 회의실)          


 복자는 지난번 방문 때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내쫓겼던 회의실 안에 앉아 있다맞은편에 조 인성 팀장이 싱글거리는 얼굴로 앉아 있고머리숱지난번보다 더 비어 보인다얼굴촌스러운 카리스마로 가득한 그가 오늘은 유달리 유순해 보인다말투사투리가 묻어나는 표준어는 그대로다     


 “ 알고김복자 대리님반갑습니다몸은 좀 ... 이제 괜찮으신가요?”     

 “ ... 네네... 감사합니다그 때 업무에 지장을 드린 것 같아서...”      

 “ 아니아니아니....건강이 제일이죠그럼 일단 뭐 커피믹스 아님 캡슐하하당연히 캡슐이 나으시겠죠?”     


   이 사람... 왜 이래갑자기...     


 복자가 당황스럽다는 눈빛을 홍 양에게 보내자홍 양은 어깨를 으쓱하다가 귓가에 대고 소근거렸다     


 “ 저 분어느 순간부터 저렇게 변하셨어요.. 저도 이유는 잘..”      


그러나 홍 양의 표정이 모르는 얼굴이 아닌 것 같았다의미심장한 미소를 저 혼자 계속 지으면서 모른 척 하는 데 티가 다 난다아무렴뭐 어떠냐떽떽 되는 것보단 말랑한 게 훨씬 낫지회의실 유리문에 이마 도장을 찍거나 쏟아지는 서류 바람에 우두커니 서 있을 필요 없는 것만 해도 어딘가.          


훈훈한 분위기로 1시간 정도의 회의가 끝이 났다이성 그룹 창립 55주년 특별 기념 제작 사보의 윤곽이 잡혔고세부 내용은 이메일로 주고받기로 했다하나 둘회의실 안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갔다가지고 온 자료와 책자를 정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복자에게 조 팀장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 그런데김 대리님.”     

 “ 조 팀장님말씀하세요.”     

 “ 사보 안에 넣을 인터뷰 내용은 오늘 오신 김에 바로 하시고 가는 게 어떠실지...”     

 “ 임원진이 벌써 섭외가 되셨나요?”     

 “ .. 그렇습니다강력하게 사보 인터뷰에 응하시겠다는 분이 계셔서요.. 저희도 별로 어렵진 않았네요... 어때요오신 김에.. 한번만나보고 가시는 게...”     


복자는 잠시 서서 오늘 출판사로 돌아가 할 급할 일들을 떠올려본다세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겠다 싶었다보통은 서면으로 처리하고 마는 일인데 굳이 사측에서 임원 인터뷰를 직접 하겠냐고 제안하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이쪽 입장에선 땡큐였다.       


  “ 좋아요그럼... 어디로 가면 될까요팀장님?”     

 

조 팀장의 시선이 회의실 유리벽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그 시선을 따라가다 한 손을 흔들며 씨익 웃고있는 마동석,,아 아니 이 실장님이 보였다뭐지이 실장님복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다시 맞은편의 조 팀장을 쳐다봤다길쭉한 얼굴이 싱글거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 이 실장님여기서 보니깐 또 새롭네요.”     


복자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이 실장에게 인사를 건넸다두 번밖에 보진 않았지만그는 언제나 든든하고 믿음직해 보인다

 

 “ 그렇죠하하저도 그렇습니다그럼 따라오시죠.”     


이 실장의 작지만 매서운 눈이 웃다가 살 속으로 폭 파묻혔다          


 “ 사무실로 가는 건가요?”     

 “ ... 뭐 비슷하죠.”     


비슷하다대답이 어색했다격투기 선수를 연상케 하는 그의 다부진 뒷모습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이 실장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가장 높은 층의 버튼을 꾹 눌렀다버튼에 새겨진 H자가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투투투투투투투


    

거친 바람 소리와 요란하게 돌아가는 프로펠러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건물 옥상 위헬기 이착륙장으로 올라온 복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뭐죠???”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주변의 소음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당황한 표정의 복자와는 달리 이 실장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그는 여유 있는 얼굴로 크게 입 모양을 벌려 외쳤다     


 “ 인터뷰 장소로 가실 겁니다저걸 타고.”     


그의 손이 가리킨 건영리한 돌고래의 형상을 하고 있는 회색빛 헬기였다그러니까 지금 저 헬기를 타란 뜻인가어리둥절해하는 복자를 이 실장이 안내하며 헬기 쪽으로 이끌었다발걸음을 따라 옮기다가복자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물리려면 지금 물려야 할 것 같아 소리를 크게 질렀다     


 “ 저 세 시간 뒤에 출판사로 돌아가야 해요!!! 이 실장님!!!!”     

 “ 네네걱정 마세요제가 다 연락드려놓겠습니다일단 어서 타시죠.”     


전쟁영화에서나 들어 봄 직한 굉장한 헬기의 소음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무슨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복자의 가슴과 허리춤에 안전벨트가 단단히 메어지고이 실장과 헬기 조종사와의 간단한 대화가 끝나자 헬기는 바로 하늘 위로 떠올랐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고 머릿속이 아찔했다어영부영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는데 지금은 헬기를 타고 발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살아생전 헬기를 처음 타 보았다손에서 축축하게 땀이 나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어느 정도 헬기 안에 타고 있다는 것이 적응이 되어갈 때쯤내다본 밖은 그야말로 감탄감탄그 자체였다 푸른 산호색 천지바다다     

 

 “하아-”      


탄성이 멈추질 못했다정오에 가까워지면서 하늘에 낀 구름을 치워 버리고 겨울 햇살이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파랑과 반짝거림이 묘하게 뒤섞인 장면이 황홀했다     

 

“ 곧 있음 제주도입니다.”     

 ...제주도랑 비슷하...???? 제주도요??”     


복자가 놀란 눈으로 앞에 무심히 앉아 있는 이 실장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외쳤다가타부타 대답도 듣기 전에어느 세 헬기는 고도를 낮춰 착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륙할 때처럼 약간 배 안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잠시 느껴지더니돌상처럼 앞에 버티고 있던 이 실장이 뒤돌아 말한다. “ 이제 내리심 됩니다.”     


누렇게 변한 잔디밭 풀들이 헬기가 일으키는 바람에 양 사방으로 흩날렸다정신없이 몰아치는 그 바람 덕에 머리카락이 미역줄기처럼 얼굴에 아무렇게 달라붙었다두 다리가 땅을 밟자마자 긴장이 풀어지며 풀렸다옆으로 기우뚱하던 복자를 어느 새 다가온 그림자가 바로 잡고 일으켰다     

짙은 갈색 치노 팬츠 위를 덮은 검정색 맥 코트를 입은 채로 우성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흩날리는 검정 머리칼이 선글라스 주변을 어른거렸다     


 “ 깜짝 놀랐죠복자씨기분... 나쁜 건 아니죠?”     


우성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씽긋 웃었다그가 햇살을 등지고 서 있어서인지복자의 눈에 우성의 머리 뒤로 후광이 비쳤다 사라졌다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어렵게 고개만 끄덕이면서 우성과 눈을 잠깐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다가 시선을 돌렸다     


  “ 12시 30아직 점심시간이에요일단 뭐 좀 먹을까요?” 

 

복자를 일으키고 나서도 우성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복자가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려고 하자앞서가면서도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점점헬기소리가 멀어지면서 며칠 전 자신의 입가를 틀어막던 매끈하고 단단한 손의 감촉이 불현듯 떠올랐다복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왜 하필 지금 그 쓰레기 생각이 나는 건데대체 왜이 한심한 것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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