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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Aug 26. 2024

21. 매너에 관하여

스물한 번째 이야기 

      

 따뜻하긴 한데설핏 낯선 기운이 들었다침대 왼쪽으로 치우쳐 누운 복자의 눈이 떠졌다그녀의 몸 위로 푹신한 크림색 이불이 목까지 올라와 있다마치 누군가가 조금 전까지 그녀의 자는 모습을 살펴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똑똑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오고노란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가 들어왔다     


 ?”     


그녀는 침대 위에 몽롱하게 앉아있는 복자의 얼굴을 보더니다시 문밖으로 나가 호수를 확인한다     


 “ 1309호 김복자 환자분 맞으시죠여긴 1307호인데... 여기 있던 남자 환자분 어디 가셨어요?”    

 

간호사의 통통 울리는 목소리에 그나마 남아있던 졸음이 확 사라졌다어안이 벙벙한 복자가 두리번거리며 작게 중얼거린다.     


 “ 그러게요.... 그 남자... 어디로 갔을까요대체....”     


제이의 병실에 홀로 남겨진 복자몇 시간 전의 키스가 떠오른다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다가 황당해진다말없이 사라진 그도여기서 잠들어버린 자신도어제의 그 키스도 모두 황당하다     


몇 번이나 핸드폰을 집었다가 놓았는지 모른다.

핸드폰이 이상한 게 아닐까?

이 병원 벽이 너무 두꺼워서 전파가 터지지 않는 게 아닐까이따위 유인원 같은 생각을 하면서 복자는 수차례 핸드폰 전원을 끄고 켜기를 반복했다하지만 아무 연락도 없었다.

제이에게서는.     


의문은 걱정이 되고걱정은 불안이 되었고그 불안은 다시 분노로분노는 확신으로 끝맺었다     



 “ .......”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새벽과 홍 양고 팀장이 병문안을 왔다

환자가 환자를 병문안 오는 게 말이 되냐며 새벽은 툴툴거렸다조용하던 병실이 복작복작해지자 가라앉으려는 기분이 나름 괜찮아졌다     


그리고 우성은 완벽한 슈트 차림으로 커다란 꽃바구니에서점을 털어서 온 건지 갖가지 책들에마카롱 세트를 포함해 백화점 지하 1층 코너를 긁어다 병실 안으로 가지고 왔다그는 성탄절 전날 밤의 양복 입은 산타클로스 같았다기대에 찬 얼굴로 잠든 복자의 양말 안에 불록하게 선물을 구겨 넣고 가는 사람     


이 실장은 한아름 들고 있던 꾸러미를 놓고복자와 눈인사를 나누었다자신을 보급형 마동석이라고 딱딱하게 농담을 던진 이 실장 덕분에 어색한 인사가 웃음으로 끝맺었다그런 그가 복자 앞으로 앙증맞은 마카롱 세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모습은 마치 뭐랄까... 추파춥스 껍질을 조심스레 벗겨내는 수컷 고릴라를 떠오르게 했다     


 “ 먹을 게 너무 많은데... 여기서 한 달은 거뜬히 견디겠는데요...”     


얼떨떨해하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살아온 세월 동안 남자에게서 이런 보살핌은사실 처음이다융숭한 공주 대접이 영 어색한 건 사실이다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좋은 건 알겠는데좋다고 두 발 뻗고 맘 편하게 다 내려놓을 만큼 해맑은 성격도 아니다자기 비하까진 아니더라도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 하는 그런 유형의 인간은 절대 될 수 없는 종자다김복자는    

 

이 실장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툼한 두 손으로 노란색 마카롱을 살포시 두 조각내서 한 조각을 입 안에 쏘옥 넣으며 말했다.

 

 “ 쪼개서 먹으면 두 달은 더 견딥니다...”     


그 모습을 보고 복자와 우성 모두 웃음을 터졌다이 실장도 따라 웃었다그가 웃으니 작은 눈이 실처럼 얇아졌다세상에서 제일 작고 불쌍한 마카롱 같았다괜찮다고 다른 사람한테 억지로 보여주는 것 말고 진짜 웃겨서 편안히 웃었다웃다가 우성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줄곧 이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던 거 같다정제된 매너를 기본으로 두던 그가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하니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혹시나혹시나 하는 만약을 붙여본다머릿속으로 이런 생각까지 혼자서 해버린다

           

당신이라면 한밤중 나와 키스하고 난 후에 누구처럼 말없이 사라지진 않겠지?                    

그때우성이 복자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한 손으로 입가에 묻은 분홍색 설탕 가루를 떼어주었다     


두근

두근.       


복자는 자신의 음란한(?) 상상이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단맛이 입 안에 퍼지고정신까지 몽롱하게 만들어 버린 걸까우성의 손이 복자의 얼굴 한쪽을 감싸다가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잠시 눌렀다정중하고 조심스럽게그러나 눈빛만은 전혀 조심스럽지 않았다너무나 노골적이고무례했다    

 

그때, “ 여보세요네네..” 이 실장이 급하게 전화를 받으며 병실 밖으로 뛰어나갔다괜스레 웃음이 나온다너무 가짜 같잖아이 실장님.... 억지로 꾸며낸 퇴장 연기는 남아있는 두 사람을 더욱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다음 날복자는 혜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닥터마틴의 검고 단단한 부츠가 보였다제이의 신발이었다그가 집 안에 있었다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는 이 곳에 있었다.        


결국 아무 일은 복자에게만 있었던 것일까?

어슴푸레한 새벽에 눈이 내렸고 

분명히 남자와 여자는 따뜻한 입맞춤을 나눴었는데...     

복자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방문을 세게 열어젖혔다마치 맡겨놓은 무언가를 당당히 받아야 할 사람처럼뒷모습이 보였다화면을 보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제이침묵 속에 리드미컬한 타이핑 소리만 둥둥 떠다니다 뚝멈췄다그리고 매우 게으르고 귀찮은 속도로 뒤돌아 말했다     


 “ 나 지금... 일하는 중인데뭐 할 말 있어요급하게?”

 

제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있어요있어요그 존댓말은 또 뭐고

낯설고다시 봐도 낯설었다뭔가 말해야 하는데분명 자신은 말할 게 한 가득이었던 거 같은데지금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벽돌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새하얗다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     

 “ 왜요뭔데요?”     

귀찮다는 말투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의자에 앉은 채 그는 일어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좀 나가달라.... 복자는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말했다.       


 “ ...됐네요방해해서.”      


복자는 있는 힘껏 방문을 닫아버렸다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것이었다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어이없게 웃음이 나온다그러더니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올라왔고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복자는 아무 신발이나 구겨 신은 채로 현관문을 박차듯 열고 밖으로 나갔다뛰듯이 걸으며 중얼거렸다남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든 말든    

 

그래 좋다오늘 이 동네 미친년은 나다   

  

 “ 뭐야지금... .. 나 가지고 장난하거야? .. 아니면 진짜 꿈이야?.. 아니지그럼 내가 그 침대에서 일어났을 리가 없지....왜요왜요하하하핫핫하하하하..아 씨발.. 아 웃겨.. ”     


차가운 바깥 공기를 쐬니 조금씩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웃음도 멈췄고어디쯤에 서 있는지 주변도 돌아보게 됐다동네 놀이터 부근이었다복자는 아래 위 두툼한 회색 츄리닝에진한 카키색 크록스를 신고 있었다아버지 것이었다     


 “ ... .. 진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다 나네정말....” 

     

복자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를 끌어당겨 닦았다그리곤 어딘가를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 양아친 줄 알았더니.... 너 쓰레기였구나완전 개 쓰레기.. 내가 다시 너랑 상종하면 정말 개...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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