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다섯번째 이야기
“ 야, 완전 대박이다.. 어찌 이런 일이 다 있노.”
“ 그러게. 하필이면 불똥이 거기 튀어? 참~ 정말. 코미디다..”
1층 본관 안쪽의 여자 화장실 문이 열리고 혜교 뒤로 복자가 따라 들어왔다.
“ 와~ 화장실 쥑이네~”
은은한 조명 아래 하얀 우유빛깔을 띤 세면대가 반짝이고, 한가운데 꽃이 핀 난초 화분 여러 개가 일렬로 장식되어 있다. 그 내부에선 적당한 농도의 장미향이 풍겼고, 잔잔히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 암튼 그렇게 또 한 명이 시집을 갔구나~”
복자는 세면대 물을 틀어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고 말했다. 혜교는 다섯 칸 중 제일 가운데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 야야!! 그래도 나는 한편으로 속이 시원하드라.”
세면대 앞에 서서 안쪽에 준비된 하얀색 타월로 손을 닦고 있던 복자가 물었다.
“ 뭐가 시원해?”
칸 안에 들어간 혜교의 목소리가 웅웅하고 울리는 소리로 들린다.
“ 영미 그 가스나 말이다. 맨날 잘난 척만 하드만 오늘 딱 당황하는 모습 보니깐 ~ 알고~ 억수로 꼬시드라.”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복자도 피식 웃었다. 가방 안에 핸드폰이 울렸다. “응 , 엄마.” 전화를 받자마자 소란한 소리와 아득히 기계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 엄마, 엄마? 거기 어디야?”
- 응?? 복자야? 엄마가 좀 급하다! 너 지금 김포 공항으로 올 수 있냐?
“ 공항? 왜? 나 지금 영미 결혼식. 오늘이잖아.”
- 아차차, 그렇지. 그럼 1시간 만에 오는 건 무리겠지? 너네 아버지가 지난달에 홈플러스에서 넣은 경품권이 세상에,,, 그게 딱 2등을 했지 뭐야~ 그래서 우리 지금 제주도 가야 돼. 젠장. 그 썩을 마트에서 한 팀 취소하는 바람에 오늘 갑자기 알게 됐어~ 3박 4일. 호텔이랑 비행기 티켓이랑 거기 여행비용 싹~ 다 대주고...
“ 와 정말?? 대박이네.. 우리 아부지. 대단하시네.”
- 그러게 말이다. 굼벵이도 구르네. 어쨌든 넌 못 가서 어쩌냐? 내가 직원분한테 우리 딸도 꼭 가야 된다고 졸라도 이 썩을 것들이 규정이 딱 2명이라고 우긴다. 넌 네가 돈 내고 우리랑 가자!
“ 갑자기 어떻게 그래? 나 출근도 해야 하는데... 3박 4일이라며... 두 분 재밌게 노시다 오셔~ 나 잘 있을게. 그래. 엉~ 걱정 말고. 엉~ 축하해. 두 분.”
수화기 밖으로 엄마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흥분과 설렘이 비집고 튀어나왔다. 경품권 당첨이 우리 집에서도 나오다니! 58년 평생, 로또 5000원도 된 적 없으신 양반이 ....참, 놀라운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요즘이다. 그러다, 순간 복자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앗! 뭐야. 그럼 나랑 그 쓰레기만 집에 있는 거야?
그 때, 제일 끝 쪽에 있던 문이 ‘달칵’하고 열렸다.
이런, 화장실에 다른 사람도 있었나 보다. 가방 안에서 립글로스를 꺼내려다가 복자는 멈칫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인형이 걸어온다고 생각했다. 조마막한 얼굴에 큼직한 눈과 오뚝한 코, 반짝이는 피부, 그리고 윤이 나는 긴 머리칼과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블랙미니원피스. 같은 여자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예뻤다. 아, 근데 이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왠지 익숙하다. 말도 안 되지만. 분명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닌데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복자의 눈이 거울 속 여자를 자꾸 힐끔거린다. 그러자 거울 속 여자도 복자에게 눈을 돌렸고, 두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아,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복자는 온몸의 전기가 짜릿하게 퍼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 여자.... 조..조..조재림?
동그랗게 커진 두 눈에 지진이 일었다. 그 조 재림이라니? 세상에!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이자, 얼마 전까지도 그녀가 출연하는 수목드라마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며 보았던가! 브라운관이 아니라 30cm 떨어진 거리에서, 그것도 나란히 화장실 거울을 바라보며 서 있다니 꿈만 같은 상황이었다.
“ 안녕하세요?”
조 재림이 복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안녕..하세요? 복자는 자신이 너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재림은 꽤 오랫동안 복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꽤 흥.미.롭.다.
“ 아..아..네 안녕하세요. 조재림씨. 실물이 훨씬 더 예쁘세요.”
로봇이 된 복자가 간신히 말을 끝마쳤다. 이런 걸 가문의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유명 연예인에게 먼저 인사를 받게 되다니.... 이런 상황에서 사인 요구하는 건 너무 예의가 없는 거겠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그럼.” 짧고 세련된 인사말을 남기고 재림은 갈색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밖으로 나갔다. 고혹적인 몸매였다. 복자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납작하고 밋밋한 몸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에이씨...
“ 야야야야!! 뭐야뭐야!! 맞지맞지 조 재림~ 와 대박~~ 너 싸인 받았어?”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혜교가 흥분하며 복자를 다그친다.
“ 아.. 맞다. 싸인~ 아~”
두 사람 얼굴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