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번째 이야기
개미출판사 입구 쪽에 흰색 i30가 멈췄다.
“복자야! 열시가 다 되간다. 기냥 월요일에 와서 해라. 너무 늦었다.”
“지금 생각난 김에 바로 해버리려고. 고맙다. 여기까지 태워주고 춥다. 얼른 들어가. ”
“알고, 가스나. 고집은. ”
살가운 잔소리를 해주는 혜교를 뒤로 하고, 복자는 서둘러 개미출판사 계단을 오른다. 혜교의 말처럼 월요일에 확인해보아도 될 일이지만, 한시라도 빨리 그의 글을 읽어보고 싶었다. 물론 그놈은 양아치고, 천하의 쓰레기지만 말이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제이의 글을 읽겠다고 가슴이 쿵쾅거리고 두 다리가 정신없이 바빠지는 이유는 단순히 편집자의 열정일 뿐이다. 절대 그 인간에게 요만큼이라도 다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아닌 건 어쨌든 아닌 거다.
컴컴한 출판사 안으로 들어가 책상 스탠드에 불을 켜고, 서둘러 이메일을 확인한 후 인쇄 버튼을 눌렀다. 총 60장이 인쇄될 거라는 창이 화면 가운데 떴다.
착착착
검정색 brother 프린터기는 정직하고 일정한 속도로 종이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단 몇 분의 기다림이 버거워 복자는 인쇄된 것부터 꺼내서 읽어나갔다. 손톱을 자꾸만 물어뜯는다.
-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무기이자 철학이다....
첫 문장의 시작은 그러했다.
글자는 흰 종이 위에서 산채로 움직이며 머릿속에 장면을 만들어 나갔다. 인물이 그려지고 그 속의 미움, 사랑, 증오, 배신 등의 감정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잔인하고 처참했다. 주인공의 머리 위로 쇠망치가 올라갔을 때 복자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온몸의 털이 삐죽하게 곤두섰다. 소름이 돋았다. 실로 이런 글은 처음이었다.
“김대리..김대리..”
“.....”
“김.복.자!!”
“으악! 엄마야!”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복자는 놀라 앉은 채로 뒤로 넘어질 뻔했다. 심장이 배꼽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온 기분이었다. 얼굴의 핏기가 쏙 빠져버렸다.
“ 뭐해? 몇 번이나 불렀는데 소리도 못 듣고?”
고 팀장이었다. 그녀는 분홍색 뿔테 안경을 벗고, 복자의 얼굴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복자의 텅 빈 눈빛이 그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 친구 결혼식 간다고 그러지 않았어? 한동안 야근 같은 건 절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시간엔 여기 웬일이야?”
“ 아. 계신 줄 몰랐어요. 이거 좀 읽는다고. 제이 작가. ”
제이라는 말에 고 팀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복자의 손에 잡힌 원고들을 바라본다.
“ 어때? 소감은?”
잠시동안, 복자는 자리에 앉은 채로 아무 말 없이 원고 귀퉁이를 만지작거렸다. 프린터의 온기는 사리지고 종이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한숨을 몰아 쉬었다.
“ 그 사람 글 처음 읽은 건데. 이런 글은 반칙 아닌가요?”
최후진술을 말하는 변호사처럼, 복자는 차분하고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는 고 팀장이 무스탕을 어깨 위에 걸친다.
“ 죽이지. 글 빨. 다른 작가들 작업 빼고 이것만 집중하자는 내 말. 이제 이해되지? 읽다 보면 작가가 궁금해지는 글이 있는데, 걔 글은 궁금하다 못해 무서워져. 대체 얼마나 또라이길래. 이런 글을 쓰는 걸 까 하고 말이야.”
“ 그렇네요. 정말.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요?”
“ 나가자. 술이나 한 잔해.”
두 사람, 가로수길 초입으로 가는 길목으로 후미진 곳에 자리 잡은 이자카야 안으로 들어갔다. 고 팀장이 들어서자, 검정색 두건을 쓴 주인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가 “고쿠죠?” 라고 묻자, 고 팀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안쪽 다다미 방안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늑한 일본 선술집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고 팀장과 둘이서 술자리를 갖는다는 게 영 어색했다.
“ 한 명 더 불렀어. 둘이면 어색하지?”
의외로 고팀장과 생각이 통하는 부분이 더러 있다. 누구? 라고 복자가 묻기도 전에, 주인장이 ‘고쿠죠’라는 이름의 사케와 모모, 염통, 토마토 삼겹살등으로 구성된 꼬치안주와 어묵탕을 가지고 들어왔다.
“우와”
조심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복자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늘 딱딱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고 팀장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잠시 걸렸다. 복자의 잔에 고쿠죠 사케를 따르며 고 팀장이 말했다.
“ 맛만 봐. 좀 강해. 많이 마시면 심하게 취하니까. ”
“ 흠, 향 너무 좋은데요.”
두 사람의 잔이 공중에서 가볍게 부딪혔다. 복자는 따끈한 사케 한 모금을 입 안에 삼키고, 그 특유의 부드러우면서 깊은 향을 천천히 음미했다. 강한 도수의 알싸한 알콜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몇 모금 나눠 마시다 한 잔을 금세 비웠다. 또 한 잔을 채웠다. 몸이 데워지고, 기분이 슬슬 좋아진다. 향이 좋아서 한 잔을 더 마셨고, 안주와 어울려 다시 한 잔을 더 마셨다. 빈 잔이 외로워 보여 다시 사케를 채운다. 두세 번을 더 반복했다. 어느새 앞에 앉아 있는 고현정 팀장의 얼굴도 한없이 온화하다 못해 귀여워 보이기 시작한다.
“ 고 팀장님 연애 안 하세요?”
어묵탕을 향하던 고 팀장의 숟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그 얼굴에도 꽤 붉은 기가 올라왔다.
" 뭐 연애라 그런 단어가 있었네. 마흔 된 여자한테 그런 말 물어 봐줘서 고맙다. 그럼, 너는 안 하세요? 연애?”
“ 후훗 아 모르겠습니다. 실은요. 제가 어떤 남자랑 키스를 했는데요. 흐흐.”
“ 자랑하냐?”
“ 아 근데. 그게 쫌 복잡해요. 한 명은 쌩을 까고, 또 한 명은 너무 현실성이 없는 거지. 그래서 연락이 없어도 서운하지도 않아요. 보면 좋은데, 안 봐도 섭섭하진 않아. 뭐냐면 좋아하는 아이돌이랑 꿈에서 키스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 죽을래. 자랑 맞네.”
“ 하아 웃기다. 자랑인가. 그런가. 근데 전 왜 이렇게 우울할까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어깨를 들썩거리며 복자가 혼자서 낄낄거렸다. 고 팀장이 마지막 남은 사케를 다 비우고, 추가 벨을 누른다. 밖에서 문이 열리고, 사케를 든 남자가 들어오는 데. 제이다.
방안의 후끈한 열기 때문에 그는 겉에 걸치고 있던 박시한 네이비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 뭐예요? 두 사람?”
그제야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고 팀장이 고개를 들어 제이를 올려다본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그레이 터틀넥 때문인지 날카로운 그의 턱선이 오늘은 좀 부드러워 보였다.
“ 오! 왔네. 우리 천재 작가님.”
고 팀장이 평소보다 발랄하게 환영 인사를 보냈고, 그 주변으로 톡 쏘는 사케향이 강하게 풍겼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복자가 얼굴을 위로 탁 쳐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이를 바라보다 이내 실실 웃는다.
쿵-
술에 취해 헤롱거리는 모습이 제이의 가슴을 움찔거리게 했다. 일부러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이렇게 보고 나니 다시 감정이 흐트러진다. 애써 눈길을 피해보려고 하지만, 자꾸만 그녀 쪽으로 눈이 가고야 만다. 제기랄.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복자가 느닷없이 차렷 자세로 빳빳이 선다. 그것도 잠시 자꾸 몸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쏠리려 한다.
“ 팀장님. 저 잠깐 쉬야 좀 하고 오겠습니다.”
풋-
제이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자꾸 웃음을 참으려고 억지로 입술을 이로 깨문다.
빈 잔에 사케를 다시 따르던 고 팀장, 얼굴을 위로 쳐들어 올려 진지하게 답한다.
“ 오케이. 아끼지 말고 있는 힘껏 하고 와. 김대리.”
푸풋-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제이가 주먹으로 입을 가린다. 이 여자들 대체 뭐야.
“ 일단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불안한 발걸음을 떼던 복자가 문 앞에서 왼쪽으로 휘청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던 제이가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듯이 안아 일으켰다. 달콤한 그녀의 채취가 열기에 달아올라 더 강하게 느껴졌다.
“ 아어. 쏘리. 그럼.”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복자가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 자리에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제이의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마지막 사케를 입 안에 전부 털어 넣은 고 팀장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흔들림은 없었다.
“ 너. 그러다가 다 들킨다.”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주섬주섬 바닥에 널브러진 무스탕을 챙겼다.
“ 복수도 좋은데. 나라면 내가 너라면 난 행복해지련다. 간다.”
어깨에 비스듬히 무스탕을 걸친 고 팀장이 손 인사를 하며, 유유히 술집을 빠져나갔다. 복자가 앉았던 빈 자리를 내려보는 제이의 눈이 한없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