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번째 이야기
자주색 무스탕을 걸친 고 팀장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아침이면 ”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취중진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밤길을 밟는다. 현정이 신은 앵글부츠의 붉은색 뱀피 무늬가 가로등 조명 아래에서 섹시하게 반짝인다. 또각또각. 리드미컬하게 들리던 구두소리가 멈춘 곳은 편의점 앞이다.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밝은 가게 내부에는 풋풋한 얼굴의 알바생이 핸드폰을 보고 있다. 창가 쪽 바에는
여고생 셋이서 참깨 라면을 먹고 있다. 그 평화로운 공기를 뚫고 뱀피 무늬의 앵글부츠는 아이스크림 코너로 돌진한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문을 열어젖히니 시원하고 청량한 찬 기운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온다. 현정은 잠시 그 안에 얼굴을 집어넣고, 술기운으로 데워진 열기를 식혔다.
“ 아 좋다.”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던 편의점 알바생의 시선이 현정의 뒷모습을 뚫는다. 이상한 낌새를 차린 그가 마른침을 삼킨다.
아이씨, 저 안에 토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하지 마라. 아줌마야. 제발. 안 된다.
알바생의 간절한 기도빨 덕분인지 현정은 냉장고 아래에서 고개를 쳐들고 일어섰다. 양손에는 월드콘이 한가득 쥐고는 당당히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눈빛에는 이미 초점이 흩어졌다. 카운터 위로 열 두개의 월드콘이 우수수 떨어졌다.
“ 손님, 이거 다 사시는 거예요?”
이 아줌마의 술버릇은 월드콘 폭격기인가 보다. 그쪽 사정이니 내 알 바는 아니고, 술 취한 사람 잡고 뭔 얘기냐 싶다. 알바생은 만사 귀찮은 얼굴로 빠르게 바코드를 찍어갔다. 삑삑삑.. 일정한 기계음이 울리던 중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현정이 ‘후’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윽. 술 냄새. 편의점 알바생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찌그러진다.
“ 아니 먹고 더 살 건데요.”
“ 아 네. 드시고 가실 건가요?”
편의점 알바생의 물음에 말없이 현정은 고개를 끄덕인다.
젠장. X됐다.
알바생은 간신히 표정 관리를 마친 알바생이 입을 열었다. “ 이만 육천사백원입니다.”
그도 이쪽 업계에서 잔뼈가 굵다. 이 정도 수준의 취객 손님이라면 아직 ‘위험’ 정도는 아니고 ‘경계’ 정도니깐, 일단 지켜보자고 생각했다. 아직 서로가 의사소통은 되니깐 말이다.
계산을 마친 현정은 열두 개의 월드콘을 한아름 안고 돌아섰다. 구석진 테이블로 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 컵라면을 먹으면서 킬킬대던 여고생들이 유리창에 비친 현정과 눈이 딱 마주쳤다.
“ 야! 너 너 너!”
“ 뭐야? 술 취했어?”
“ 윽, 술 냄새. 이 아줌마 뭐야?”
“ 왜요?”
한 성깔할 거 같은 여고생 셋이랑 술 취한 무스탕 아줌마의 결투가 벌어질 찰나였다. 그 모습을 직관하고 있는 카운터 앞 알바생은 숨죽여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면서 회색 후드티를 머리에 쓴 남자 손님 한 명이 들어온다.
“ 라면 먹고 나서, 이걸로 입가심해!”
현정은 월드콘 세 개를 여고생들에게 내민다. 팽팽한 긴장감이 픽하고 빠져버렸다. 어이없지만 재밌다는 표정으로 세 명도 고맙다며 월드콘을 한 개씩 건네받았다. 재밌는 아줌마네.
그 옆으로 좀 떨어져서 현정은 딱딱한 편의점 의자에 털썩 앉아 나머지 월드콘 중 한 개의 껍질을 벗겨 내 거칠게 한입 베어 물었다. 세렝게티 초원의 고독한 암사자처럼 말이다.
창가 쪽을 주시하던 알바생의 시선이 계산대에 오른 맥주 두 캔으로 옮겨졌다. 그 앞에 서 있던 회색 후드티를 입고 있던 남자, 알바생의 시선을 따라 무심코 뒤를 보다가 “어?” 하고 멈칫한다.
아는 얼굴이다.
저 여자.
저 부풀린 파마머리.
아이스크림을 소갈비처럼 뜯어 먹는 저 여자.
개미출판사 고 팀장?
인성은 맥주 두 캔을 들고, 현정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하, 아까 눈 마주친 것 같은데. 인사라도 하고 가자.
이상하게 개미 출판을 밀어주는 민 전무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인성이었다. 안 그래도 초반에 김복자 대리를 무시한 행동 때문에 눈치가 보였는데, 이번 기회에 개미출판사에 점수라도 좀 따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현정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진한 술 냄새가 확 느껴졌다.
아따 아줌마 술 억수로 마싰네.
“ 아이고, 고 팀장님 아니세요? 여기서 뵙네요.”
아직 경상도 사투리가 묻어있는 인성의 표준어 공격에 현정이 잠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초점이 풀린 눈에, 입가 주변에 허연 아이스크림이 묻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상태 영 삐리한데. 아. 괜히 아는 척한 거 같은데. 아이씨. 모르겠다.
잠시 망설이다가, 인성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 누구?”
눈을 살포시 뜨며 현정이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자,
“ 이성그룹 홍보팀요. 조인성.”
뒤에 있는 여고생들을 의식한 탓인지, 인성이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 조, 조 뭐?”
인성은 어쩔 수 없지 자포자기 심정으로 조금 더 큰 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현정이 환하게 웃으면서 우렁차게 외쳤다.
“ 아! 조 인 성!”
뒤에 앉아서 월드콘 껍질을 벗기고 있던 여고생들 후다닥 놀라서 주변을 막 둘러본다,
“ 뭐야? 뭐야? 조인성?”
“ 조인성?? 너도 들었지?”
“ 어디어디??”
괜히 민망해진 인성이 머리 위 후드 모자를 더 끌어당겨 얼굴을 가린다.
“ 아니, 무슨 아이스크림을 이렇게 드세요? 이 추운 날에.”
“ 조 팀장도 먹어요. 월드콘. 좋아하시려나?”
“ 아, 근데 술 많이 드셨나봐요? 전 혼술하려고 맥주 사러 왔는데.”
“ 아 혼술, 혼밥. 혼자서 잘 먹고 잘 놀고 해야 하는 세상이예요. 그죠? 혼자서 나이도 잘 먹고. 그러다보니 마흔이네. 하하.”
현정은 한 손에 월드콘을 쥔 채로 다른 한 손에 턱을 괴며 계속 말했다.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려 허연 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인성은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 테이블 바닥의 허연 자국을 훔쳤다.
“ 조 팀장은 연애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 훅이 들어왔다. 고현정의 질문에 월드콘 껍질을 까던 인성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자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 한 덩이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땅콩이랑 초코 크림이 묻은 가장 맛있는 부분인데 아깝다. 바닥에 점점 녹아가는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바라보며 인성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사실 서른여섯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는 위인이었다. 대학생 되기 전까지 부산에서 살다가 인 서울 성공하면서 이 악물고 대기업 취직에 승진도 빨랐다. 나름 뭐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연애는 염 젬병이다. 소개팅을 나가도 세 번째 만남 다음으로 이어지기가 어려웠다. 외제차를 뽑아도, 어설픈 서울말을 써보아도 결과는 비슷했다. 왠지 모르게 목 안이 깔깔해져 탁, 맥주 한 캔을 땄다.
“ 오늘 누가 나한테 연애하냐고 묻더라고요. 그 질문을 딱 듣는데. 연애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거 알아요? 그런 질문 듣는 거 자체가 너무 오랜 만이였다는 거. 그리고 알았지. 마흔이 뭐 어때서. 내 나이가 뭐 어때서. 성질 좀 더러운 거 빼고는 나 괜찮고 섹시하거든. 안 그래요?”
“ 네. 뭐 그렇죠.”
“ 내가 나를 너무 방치했어. 뭐 땜에. 누구 눈치 본다고. 전혀 그럴 필요 없는데. 나는 나대로 즐기면 되는 거야. 만나고 연애하고 잠도 자고. 그렇게 뜨겁게 살면 되는 거라고.”
“ 네네.”
열변을 토하는 현정을 마주하며 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정보다 네 살 어리긴 했지만 저도 뭐 현정이 말하는 게 어떤 느낌이진 대충은 알 거 같았다. 삼십 대 중반이 되자 주변에서는 급하게 결혼할 상대를 찾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거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고 팀장은 여자니, 아마 저보다 더 압박이 컸겠구나 싶었다. 뭐, 성질머리가 드센 건 맞지만 인물이나 몸매는 멋지다고 흠흠, 생각한다.
“ 내일이면 마흔하나인데. 그러니깐 그런 의미로 나랑 잘래요?”
“ 풋- 뭐라꼬예!”
인성의 입에서 분수처럼 맥주빔이 쏟아져 현정의 얼굴에 촉촉이 뿌려졌다. 시뻘개진 턱 아래로 침과 맥주가 적당히 섞여 로열젤리처럼 아래로 뚜욱뚜욱 떨어졌다. 편의점 안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석고상처럼 얼어버린 인성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현정이 무심히 손을 들어 얼굴을 닦아낸다.
“ 미스튼가. 촉촉하네요. 안 그래도 이 안이 좀 건조하던데.”
쿵쿵쿵.
경상도 싸나이의 심장에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