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번째 이야기
“ ... 전”
아직은 때가 아니다.
“전 같은 출판사 동료인데. 회식 중입니다. 폰을 두고 잠깐 나가신 거 같은데 다시 연락주시겠습니까?”
- 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제이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기분이 개운치는 않았다. 우성이 복자 옆에 있는 남자의 존재에 대해 노골적으로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이 느껴졌다. 분명히 그는 그녀에게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테이블 위로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우성이 끊어진 폰을 바라본다. 표정이 복잡하고 미묘하다.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지는 헤링본 코트의 한 쪽 끝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우성은 생각에 잠겼다. 날렵하고 우뚝한 콧날 옆으로 깊은 음영이 드리웠다. 그리고 그는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린데... 왜 낯설지가 않을까?”
징징-
도어락이 열린 순간, 우성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뭔가 다급함이 묻어나는 벨소리였다.
“여보세요. 어머니. ”
- 응, 우성아. 재림이랑 같이 있을 텐데... 미안하구나. 지금 바로 이원동 병원으로 와줘야겠어. 할아버지가 좀 안 좋으시다.
“바로 갈게요.”
늘 냉정하고 침착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우성은 뒤돌아 다급하게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택시 기사가 룸미러를 통해 뒷자리를 살핀다. 허연 얼굴에 곱상하게 생긴 갈색 눈의 청년과 거의 기절 상태인지라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여자 손님.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 이 장면 익숙한데.” 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밤이 내려앉았고 도시의 불빛이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빛나고 있었다.
한남대교 위를 지나는 주황색 택시. 그 뒷자리에 보이는 쓸쓸하면서도 다정한 갈색의 눈빛.
복자 집 앞에 도착해 미터기를 끄는 택시 기사님.
그가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웃으면서 말한다.
“ 어이, 잘생긴 총각. 아직도 여자 친구 술버릇 못 고쳤구먼. 허허허”
인상 좋은 기사님 얼굴과 자신의 무릎 위로 침을 흘리며 잠들어버린 복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제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러게요. 말을 잘 안 듣네요. 여자 친구가.”
그의 마음 한쪽에 따뜻하고 보드라운 바람이 불었다가 사라진다.
“어허, 그렇게 이쁘다 이쁘다 하기만 안 돼. 여자 버릇 나빠져. 총각, 아직 모르는구먼. 요즘은 나쁜 남자가 대세야! 거, 잘생긴 친구가 그걸 모르네. 허허허허”
“그러게요.”
작게 중얼거리며, 제이는 복자의 왼쪽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남들 눈엔 당신과 내가 꽤 어울리게 보이나 봐. 남자친구라는 말 두 번이나 듣게 해주고.
12시가 지난 시간인지라, 집 안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품에 안겨 있던 복자가 “음. 뭐야. 뭐냐고. 씨.” 라고 중얼거리자, 제이는 서둘러 그녀의 입을 손으로 살짝 막았다.
“ 쉿”
작게 달래 보아도, 그녀가 그것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다행히, 복자의 부모님 방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제이의 품에 안긴 복자가 답답한지 자꾸 두 발을 공중에서 휘적거린다. 제이는 최대한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방 안 침대 위로 눕혔다. 몸에서 열기가 올라오는지 반쯤 잠든 상태에서 옷을 벗으려고 손으로 겉옷을 잡아당기려는 복자. 혼자서 끙끙대고 있다. 이 모습을 선 채로 지켜보고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이가 그녀의 코트를 벗겨 주고, 스카프를 풀어준다. 어슴푸레한 달빛을에 의지해 하얗고 가느다란 목을 지나 쇄골 아래로 파여 있는 브이넥 부분에 닿았다. 움직이던 손이 살짝 멈추었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 조심하며, 흐트러져 있는 복자의 머리를 베개 위로 편하게 올려 주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한가운데, 제이는 오른손을 뻗어 침대 옆, 스탠드 불을 켠다. 가만히 검지 옆으로 여자의 뺨을 쓸어내린다. 솜털의 결대로 콧노래 흥얼거리듯 사뿐히 훑었다. 보드라운 감촉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보드라운 머리칼 위로 고개를 숙였다. 부들하고 말랑한 여자의 귓불이 제이의 왼쪽 뺨에 닿았다. 기분 좋은 촉감이다. 달콤하고 따뜻한, 매번 자신을 설레게 하는 체취도 함께 느껴졌다. 제이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 체취 안으로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고, 밤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안다. 잘 알고 있지만, 제이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잠든 어깨 위로 입을 맞추었다. 그는 입술을 댄 데로, 흐릿한 달빛처럼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입술 위를 덮은 따뜻한 살결과 쇠망치로 내려찍는 심장의 거대한 울림만을 느끼면서 제이는 기도하듯 복자의 목에 얼굴을 깊게 비볐다.
한 번 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제이는 작게 속삭였다.
“ 잘자. 김복자.”
복자의 몸이 조금 뒤척이긴 했지만, 이내 평온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는 복자의 머리 위쪽으로 한 팔을 놓고, 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 다른 한 손으로 여자를 토닥였다. 칭얼대는 아가를 재우는 엄마처럼. 누군가에게 이런 행동을 한다는 자체가 처음이었지만, 제 마음속에 밀려오는 잔잔한 느낌이 썩 좋았다. 갈색 눈빛 속에 늘 머물던 쓸쓸함이 사라져 버렸다.
“오늘, 딱 하루만 널 안고 잘게.”
가까이 다가가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를 껴안았다. 달콤한 냄새에, 작고 약하지만 부드러운 무언가가 그의 가슴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동여매고 있었던 강철 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져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부서진 그 틈으로 흔들리고 말캉거리는 감정들이 스며들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 감정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더욱 그녀를 꽉 껴안는다.
침대 위 창문 너머로 새벽의 달빛이 그런 두 사람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고, 그의 인생을 변화시킬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 주름진 커튼을 흔들었다.
주변의 빛이 완전히 푸르스름해져, 새벽의 정점을 지났다. 복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잠들어 있는 제이를 발견했다. 머릿속을 떠다니던 이런저런 질문들을 다 뒤로 물려버렸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곤하게 잠이 든 얼굴은 아기처럼 순해 보인다. 늘 붙어둔 독기가 빠져버려서일까.
왠지 모르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자는 자신이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설명할 순 없었지만, 너무나 익숙한 자기 방, 자기 침대 위에 제이와 함께 누워 있는 것이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편안하고. 좋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이대로 잠시만 있고 싶었다.
그는 분명 차갑고 냉정하고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태도로 상대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몹쓸 행동을 한다. 그런데 그런 그를 마냥 나쁜 사람으로만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비밀을 평생 끌어안고 산 건 아닐까?
어슴푸레한 새벽빛 아래서 보는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몽환적이다. 복자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본다.
무슨 남자 얼굴이 이래.
괜히 주눅 들게 하는 속눈썹 길이다. 그 아래엔 정성스레 빚은 콧날 옆으로 작은 갈색 점이 찍혀 있었다. 여기 점이 있었네? 그를 감싸고 있는 무수한 수수께끼 중의 실마리를 하나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때였다. 파르르 속눈썹이 떨렸고, 복자는 얼른 눈을 감았다. 부풀어 올랐던 그녀의 마음이 놀라 오그라들었다.
사람 크기만한 거대 고슴도치가 되어 온몸에 돋아난 가시를 제이가 있는 쪽으로 곤두세웠다. 눈을 감고, 자연스러워 보이게 입 밖으로 일정하게 숨을 내쉬려고 노력했다. 다만, 잠잠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만은 멈출 수 없었다. 제발, 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 나는 자는 거다. 나는 자는 거다. 잠자고 있다.’
자가 체면을 열심히 돌리던 찰나, 뺨에 닿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머릿속을 채우던 무수한 생각들이 파도에 씻겨 사라지고, 배꼽 아랫부분부터 간질거림이 올라왔다. 그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보드랍고 말캉한 감촉이 이마 위에 닿았다. 그건 마치 ‘너를 좋아해.’라고 말하는 고백 같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정지해 버린 기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전율이 멈추지 않고 긴 줄기로 흘러내렸다.
침대가 조금 흔들리고 감촉도 사라졌다. 달칵. 문이 열리고 그가 밖으로 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쿵쿵쿵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
후우우-
복자는 거친 숨을 한꺼번에 길게 내뱉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텅 빈 옆자리를 바라본다. 제이가 누워 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