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아홉번째 이야기
“ 너 그러다가 다 들킨다.”
제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 팀장을 바라본다. 그녀는 주섬주섬 자주색 무스탕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복수도 좋은데 나라면 내가 너라면 난 행복해지련다. 간다.”
한쪽 어깨에 비스듬히 무스탕을 걸친 고 팀장이 손 인사를 하며, 유유히 술집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무거운 눈으로 제이는 바라본다.
- 징
방 안에 전화가 울리고, 제이는 자신의 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다. 재림이다. 그의 눈이 가늘게 떴다가 원래 자리를 찾는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 내가 보낸 사진 받았지?
“ 응.”
- 응? 그게 다야?
“ 그럼?”
- 하 그래. 좋아. 너한테 감정 같은 건 씹다 뱉은 껌이라는 건 아는데. 나는 좀 심각해. 이 상황이 맘에 안 들어. 내가 그따위 되지도 않은 여자한테
폰을 쥔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지만, 그의 얼굴은 오히려 잔잔하기만 하다.
- 우성 오빨 뺏길 순 없잖아?
“ 그럴 일은 없을 거야 .”
제이는 가장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다시 한번 자신에게 되새긴다. 깊고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 매서운 빛이 감돌았다. 그 빛은 재림이 낮에 전송한 몇 장의 사진을 뚫을 듯이 보고 있다.
헬기에서 내린 복자, 그리고 그 손을 맞잡은 우성.
두 손을 잡은 채 카바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그리고 행복하고 설레는 눈빛으로 복자를 바라보는 우성의 얼굴.
입맞춤하는 두 사람.
고 팀장이 떠난 자리에 앉아 제이는 고쿠죠 한 잔을 들이켰다. 화려한 향기에 묵직한 맛이 뒤따라왔다. 복자를 바라보는 우성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분명히, 한 여자에게 빠진 사내의 얼굴이었다.
제이가 기다리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철옹성처럼 견고하던 우성의 마음에 조금씩 빈틈이 벌어지는.
우성이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 그 순간, 그를 완전히 박살내서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이 준비한 무대 위에 반병신이 된 우성을 주인공으로 세워 놓고 제대로 된 진짜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것. 아들의 추락 앞에서도 과연 최민재는 냉정할 수 있을까? 회사의 경영권을 얻기 위해선 그 어떤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는 그 여자가, 아니 그 괴물이 말이다. 만천하에 이성그룹의 추악하고 더러운 민낯을 그대로 까발리는 것.
그 바람이 이제껏 제이를 살게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후-” 저도 모르게 깊은숨을 내쉰다. 자신과 우성 사이에 한 여자가 끼어들었다. 그 여자는 자신이 비집고 들어온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있다. 발에 걸린 덫을 두려움이 아니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손쉬운 미끼다. 너무나 쉽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보면서 제이는 즐거운 게 아니라 자꾸 마음이 쓰이고, 궁금해지고, 그리웠다.
우성만 약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도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 여자의 어떤 점 때문이었을까?
술기운인지, 곧 있으면 이 안으로 들어올 그 사람 때문인지 입안이 탔다. 감정 따위야 아무렇지 않게 다루던 자신인데, 왜 그 여자 앞에서는 제어가 어렵다. 하필, 지금 병실에서의 입맞춤이 떠오르고, 몸이 더워진다. 제길.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 어라? 고 팀장님은?” 살짝 혀가 꼬인 소리로 복자가 물어본다. “가셨나? 으 의리없게.” 혼자 묻고, 혼자 답한다.
그 모습이 귀엽지만 절대 웃을 수 없다는 굳건한 의지로, 제이는 입술 끝을 깨물며 참는다. 툭- 하고 맞은편에 털썩 앉아 버리는 복자가 한 손에 턱을 괸 채로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갈색 눈동자를 제외한 그의 모든 신체가 그녀를 향하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사케 한 잔을 더 들이킨다.
“ 헤. 있잖어. 너 보면 할 말 있었다.”
그제야 제이가 고개를 들어 복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깊고 정직한 시선이었다. 빨갰던 얼굴이 차차 연해지고 있다. 동그란 까만 눈은 노란빛 조명을 받아 얼핏 다른 색으로 비쳐 눈길이 간다. 제이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지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불가항력이다. 정말. 이 여자.
“뭔데요?”
시큰둥하게 내뱉으면서 제이는 복자 앞에 놓인 빈 잔에 미지근한 물을 부어 주었다. 복자는 두 손가락을 지휘하듯이 공중에 휘휘 내저으며 반쯤 감은 눈으로 말한다.
“ 응. 너가 맞았어. 전번에 네가 한 말. 대머리. ”
“ 대 대머리?”
“ 응, 대머리. 영미 남편. 정말 가발이더라. 오늘 결혼식 갔었잖아. 완전 빵 터졌지. 하하. 그런데 넌 그거 어떻게 알았어?”
복자가 물이 담긴 잔을 입에 갖다 대며 묻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제이는 반쯤 남은 사케병을 자신의 잔에 부으며 말한다.
“ 다 아는 수가 있지. 난 모르는 게 없거든요.”
“ 쳇, 알기는 뭘 알아. 잘 찍은 거지. 뭐. 근데 이거 맛이 왜 이래? 물맛 같은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복자가 입맛을 다시며 술잔 속을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러자 제이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완전 술꾼이구만.” 하고 말하자, 복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클클거렸다. 뭐가 그렇게도 재미있는지 양쪽 어깨가 들썩거린다.
술잔 끝부분을 동그랗게 매만지고 있던 제이가 고개를 들어 복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린 하얀 손가락 사이에 반짝거렸다. 손을 뻗어 만지니 축축하게 물기가 묻어 나왔다. 제이는 좀 더 몸을 기울여 그녀의 두 손바닥을 감싸듯 얼굴에서 떼어냈다.
눈물범벅이었다.
그녀의 분홍빛 볼 주변으로 물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눈이 빨갛고, 코가 빨갛고, 입술도 같았다.
“ 너무 좋다. 지금. 너 쓰레기, 양아치 맞는데. 아는데. 아는데.”
제이는 복자의 얼굴을 감싸듯 두 손으로 껴안고 눈물을 천천히 닦아 주었다. 그 와중에 굵은 눈물줄기가 그의 엄지손가락 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참, 따뜻한 눈물이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다. 한심하다. 이런 내가. ”
당신은, 참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할 수 있는 건데? 눈물로 그렁해진 복자의 두 눈을 홀린 듯 바라보며 제이는 묻고 싶었다. 같이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벅차올랐다.
제이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감정 같은 건, 얼마든지 꾸미고 바꿀 수 있다고 자만했었다.
그가 만들어 낸 소설 속 수많은 캐릭터처럼.
오만했고 멍청했다.
자신은.
제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쓰러진 복자 쪽으로 걸어가, 그녀를 일으켰다. 복자는 그렇게 엄청난 말로 상대를 큰 혼란 속에 빠뜨려 놓고서는 잠과 술기운에 취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등 뒤쪽으로 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아 올렸다. 달콤하면서 따뜻한 그녀의 체취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머리 위로 입술과 코끝을 다정히 묻는다. 그녀와 있으면 외롭지도, 차갑지도, 잔인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자꾸만 행복해지고만 싶었다.
“ 집에 가자.”
작게 속삭였다. 복자의 입에서 대답인지, 잠꼬대인지 색색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 징
전화가 울렸다. 그는 네이비색 코트 바깥쪽 주머니 안에서 폰을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우성’이었다.
화면을 터치하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 여보세요?
“ 여보세요.”
상대편 쪽에서 아무 답이 없다. 몇 초가 흐른 후,
- 거기 김복자씨 핸드폰 아닌가요?
“ 맞습니다.”
두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씩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 복자씨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곤란한데요. 지금은.”
- 그런데 지금 전화 받는 분은 누구시죠?
제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리면서 그의 한쪽 눈썹이 들썩 움직인다.
“ ...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