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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광년 Sep 02. 2024

26. 내 행동이 혹시 미지근했었니

스물여섯번째 이야기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레스토랑 키친101 입구 안쪽으로 재림이 들어선다. 얼굴의 절반이 검은색 선글라스로 가려져 있었지만, 호텔 매니저는 가벼운 안부를 전하며 그녀를 vip룸으로 안내했다. 캐주얼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컨트리 하우스를 배경으로 한강의 야경이 깔려있었다.      


 왔구나.재림아. 

    

민재가 한 손에 마티니 잔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시한 흰색 와이셔츠 아래로 오묘한 빛깔의 슬렉스가 감각적으로 그녀에게 어울렸다. 50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그녀는 모던하면서 고급스러운 특유의 분위기가 눈길을 끈다.  

    

 제가 5분 늦었죠. 죄송해요.

 

도도하고 새초롬할 것 같던 재림이 순식간에 천진한 아이로 변했다. 물론, 재림의 그런 모습을 아무나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림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오랜 세월 그 가문의 이름을 지켜왔고, 이성 그룹을 포함한 여러 기업의 총수들은 항상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민재는 재림의 부모와 더욱 돈독했다.        


그녀가 20년 동안 지켜본 재림은 유난히 총명하고 예쁜 아이였다. 이쪽 세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본이 갖춰진 아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재림은 자신의 아들, 우성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앞으로 이성 그룹의 오너가 될 우성에게 막강한 정치권력의 뒷배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촬영 끝나고 쉬어야 하는데 내가 괜히 부른 건 아닌가 모르겠네.”     


민재는 세련된 손동작으로 재림에게 맞은 편 자리를 권하며 넌지시 묻는다.    

  

 에이, 설마요.”     


익살스러운 표정이다. 민재가 따라주는 샴페인을 한 모금 삼키며, 재림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런 자리 아니면, 우성 오빠 얼굴도 못 봐요.”     

 걔는 여자 다루는 센스가 영 없어. 내 아들이지만 그런 면은 좀 답답해.”      


민재와 재림은 뵈브 클리코를 마시면서 공통의 화제를 즐겁게 나누었다. 그들은 벌써 가족이 될 준비를 모두 마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룸 안의 문이 열리고, 우성이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부드러운 크림색 목 폴라에 해링본 소재의 쓰리 버튼 코트를 매치한 그는 12월 잡지 화보 속 어딘가에 머물다 튀어나온 것 같았다. 어머니와 재림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의 표정이 이내 굳어졌다.     

 

  어머니. 재림이도 왔네?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우성이 재림과 좀 떨어진 거리에 앉는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재림은 뵈브 클리코가 든 잔을 단숨에 마셔버린다. 옐로 라벨의 새콤한 우아함이 입 속에 잠시 머물지도 못하고 빠르게 사라진다. 좌우를 살피는 민재의 동공이 흔들렸지만 이내 안정을 찾았다. 그들은 아들을 향해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인다. 여유 있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위압적인 그 미소.  

    

 오랜만에 데이트 좀 하라고. 자리 좀 만들었어. 다 같이 식사하는 건, 아버지 일본에서 돌아오시면 같이 하자. 총리님도 괜찮으시겠지? 재림아? 그럼, 오늘은 너네 둘이서만.”     


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 쪽으로 걸어가자, 어느새 우성이 일어나 카키색 퍼를 집어 들고 섰다. 그 모습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재림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그럼요. 아버지 어머닌 언제든지 되세요.”     


우성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자, 민재는 카키색 퍼를 건네받으며 우성에게 잠시 눈길을 보낸다. 날카롭고 엄중하다.      


 그럼 엄마는 먼저 간다. 재림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민재가 룸을 나가고, 기다렸다는 듯이 전채 요리가 들어왔다. 사과와 펜넬 살사가 어우러진 레드 레디쉬, 오세트라 케비어, 아보카도, 사케 젤리였다.      


조금은 난감한 표정으로 민재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 우성이 다시 앉는다. 그는 차가운 물 한잔과 마티니 한 모금을 연거푸 마셨고, 재림은 빠짐없이 그런 그를 지켜보며 사케 젤리를 한 입 넣었다. 아보카도의 밍밍한 맛만큼이나 불편한 침묵이었다.      


  오빠, 실망이야.”     


언제나 마음이 더 큰 쪽이 실망하고 감정이 상하기 일쑤다. 재림이 뾰족한 눈으로 투정을 부린다. 망가진 자존심을 들키지 않으려 그녀는 애쓰고 있었다.     


  “.....?”     


우성은 추가로 나온 마티니 한 잔을 더 마시면서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재림을 바라봤다.     


 제주도 빌리지 말이야. 날 제일 먼저 초대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그제야 우성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는지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스쳤다 사라졌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는 의자에 허리를 쭉 펴고 앉았다. 자세를 고쳐 앉은 그가 조재림이름을 부르자 재림도 긴장한다.  

    

 난 여러 번 니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을 표현한 것 같은데. 내 행동이 혹시 미지근했었니?” 

    

재림의 가느다란 목 한가운데가 멈칫하고 굳었다 움직였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 위로 천장의 샹들리에가 어른거리며 비쳤다.      

 

 아니, 미지근 아니지. 늘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차가워. 그리고 매너 있지. 능력 있고 어른스러워. 틈 하나 없이 완벽해. 그러니까 아직 나에 대한 마음이 안 생기는 것 따위의 단점은 내가 안고 가야 하지 않겠어? 제일 좋은 남편감을 찾았는데 포기할 순 없잖아? 그깟 자존심 때문에.”          


재림은 톤 하나 흔들리지 않고, 우성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다 그렇고 그런 사정 알면서 만들어진 인연인데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민우성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성 그룹의 후계자로, 야망이 어마어마한 모친을 뒀으면서도 그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 적당히 튕기면 모른 척 장단 좀 맞추어 주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진심으로 선을 긋고 결혼은 아니라고 한다.      


 ?

 

그가 자신을 밀어낼수록 더욱 강하게 그를 원하게 된다. 반전으로 그가 이것까지 계산을 하고 철벽을 친 거라면 그의 작전은 성공했다. 싫든, 좋든 민우성은 조재림과 결혼하게 되어 있다.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신분으로 태어난 우리네 같은 계급은 실상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 없는 운명이니까. 아직 민우성이 그걸 모르고 있다면 이번 기회에야말로 제대로 알게 되겠지.      


말없이 재림을 바라보던 우성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남아 있는 마티니 두 모금을 모두 입속에 털어버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날게. 친한 동생도 하기 싫은 게 아니라면, 다신 이런 대화 하지 않기로 하자. 너도 이제 어른이고. 나도 너한테 그에 맞는 대우를 해 주고 싶다.”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메인요리가 들어왔다.      


 식사는 하고 가자. 오빠 눈엔 내가 교복 입은 학생 같아 보이겠지만, 나 꽤 유명한 정치인 딸이고, 배우야. 5분도 안 되서 들어온 남자가 나가 버리면 내 꼴이 뭐가 되겠어?”    

 

차분히 말을 마친 재림은 핑크빛으로 익은 푸아그라의 한쪽 면을 나이프로 작게 썰었다. 그녀는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우성을 올려다본다.      


 앉아줘. 부탁이야.”           




(호텔 주차장 안)         

 

  드르르르륵, 드르르륵     

혜교는 세 번이나 차 키를 뽑았다 다시 안으로 꽂고 힘주어 비틀어 돌려보았다.   

    

   이거 와이라노. 오늘따라 이 꼬물차.”     

 ? 자꾸 안 돼? 보험회사 불러야 하는 건가?”     

 안 된다. 그라믄. 여기서 레카차 끌리가야 된다. 안돼 안돼! 힘내라, !”     


주인의 간절함을 느꼈는지, 그제야 골골거리던 차에서 드르륵 쿠~” 익숙한 시동 소리가 들렸다. “   다행이다. 하마터면 피똥 쌀 뻔 했다. 가자!” 혜교는 코 밑에 송글송글 올라온 땀을 닦았다.   

   

-.


복자의 폰에서 메일도착 알람이 울렸다.  

     

- 발신자: 제이/ 중간 원고 검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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