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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만 Jan 20. 2019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한다!

경남학생인권조례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경남이 시끄럽습니다. 경남도교육청이 추진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때문인데요. 저는 현직 교사입니다. 현직 교사로서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평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됩니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사회를 향해 말하지 않고 학교 안에서만 수근대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아 용기내어 글을 씁니다.


학생인권조례를 원안대로 통과시키라는 쪽과 삭발과 혈서까지 쓰며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며칠 전 창원에 갔다가 시청로타리를 보며 깜짝 놀랬습니다. 예전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라는 글들이 많았으나 이번에 보니 '학생인권조례 결사반대'의 내용이 담긴 현수막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의문이 들었습니다. 해서 저는 아이들과 학교에서 학생인권조례로 토론 수업을 진행한 적도 있었습니다. 관련글을 링크합니다.

http://yongman21.tistory.com/1385(출처:김용만의 함께 사는 세상)


확실한 것은 아이들도 학생인권조례를 무조건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몇몇 성인들이 반대하는 내용에 대해 아이들은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으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에 대해 아이들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저는 우선 용어의 변경을 제안합니다. 현재 '학생인권조례'는 주 내용이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 주 대상입니다. 해서 학생인권이 강화되면 반대로 교권이 추락할 것이라는 걱정이 많습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아니라 '학교인권조례'가 되어야 합니다. 


학교는 학생과 교사만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학생과 교사들이 갈등사항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학교안에서 교사와 교사간에도 비인권적인 행태가 나타나며(예를 들면 기간제 교사에 대한 예우입니다.) 학생 사이에서도 비인권적인 행태가 나타납니다. 학교와 교육청 사이에서도 비인권적 행태가 나타나며 정치인들과 교사들 사이에서도 비인권적 행태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아무리 아이들에게 중요한 일이 발생해도 국회의원이나 도의원들의 자료 요청 공문이 오면(대개 이런 공문들은 시일이 촉박합니다.) 만사를 제치고 이 일부터 해야 합니다. 즉 아이들보다 행정업무에 교사들은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만약 이 공문을 처리한다고 아이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그 책임또한 오롯이 교사의 몫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은 이런 상황에서 무기력합니다. 동료교사들조차 힘이 되어주기 보다는 안타까워하는 것, 딱 그정도밖에 해주지 못합니다. 관리자와 교사간의 비인권적인 행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교인권조례'가 되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교권보호의 내용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습권을 누구나 말하지만 교사의 수업권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습니다. 교사의 수업시간은 교사 자체의 고유한 시간입니다. 아이들의 학습권도 중요하지만 교사들의 수업권 또한 중요합니다. 수업권을 존중한다면 교사들에게 필요 이상의(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공문을 보내는) 하달식 공문을 함부로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학교인권조례'에는 교사들의 수업권, 자주권, 교육권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교사와 학생을 갈등구조속에서 볼 것이 아니라 살벌(?)한 사회 속에서 그나마 민주시민으로서 성장을 위해 고민을 함께 하고 같이 연구하는 상생하는 관계를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교사들은 당당하지 못합니다. 해서 하고 싶은 말을 사회를 향해 거침없이 말하지 못합니다. 관리자의 공정하지 않은 일을 목격하더라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교사는 드뭅니다. 관리자가 인사권을 쥐고 있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과한 학부모님을 보고도 "저의 교육철학입니다. 저는 이런 의도로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직접 확인해 보시죠."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말도 안되는 민원이 하나라도 들어오면 쩔쩔맵니다. 큰 잘못을 안했는데도 말이지요.


학교는 살아있는 작은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통제하고 억압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학생인권조례 이전에 학교인권조례가 선행되어야 할 이유 중 또 하나입니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모든 선생님들이 동등하지도 않습니다. 정말 다양한 가정의 다양한 아이들, 그리그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교사가 되기도 합니다. 작은 사회는 말을 잘 듣는 시민을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받지 않으며 다른 생각을 가진 이와 끝장토론을 해 볼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저는 학생인권조례라는 용어를 반대합니다. 학교인권조례가 필요하고 자연스레 모두의 인권조례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를 학생을 통제하고 관리해야 하는 감독인, 상부명령을 그대로 이행해야하는 행정인, 학부모, 학생, 동료교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직업인으로서 회의를 가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이 부분에는 자신의 요구를 당당하게 외치지 못한 교사들의 책임도 큽니다.


인권은 누가 허락해서 쥐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권은 아이들만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학교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다녀야 할 곳도 아닙니다. 아이들 뿐 아니라 교사들도 가고 싶은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2019년 2월 명퇴를 신청한 교사가 6,000명이 넘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교사들도 있기 힘든 학교에 아이들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옳은 신념으로 아이들을 당당하게 만나는 교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집에서도 못하는 것을 교사들에게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학부모님들이 줄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사는 컴퓨터 앞이 아니라 아이들 곁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학교에는 학생인권조례가 아니라 학교인권조례가 필요합니다. 


교육은, 학교는, 그 사회의 미래입니다. 한국 교육은 엘리트를 선발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만족하시나요? 그렇다면 손 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 지금의 아이들이 성인이 될 사회를 상상하셨을 때 걱정이 된다면, 변화가 필요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외치기 전에, 나부터 가정에서, 직장에서 정의로운 사람인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시간과 인권은 세상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임승차를 하려 하지 말고, 힘을 보태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학교는 분명 변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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