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성격장애, 경계선을 걷는 기분
* 이 글은 <나를 좀 이해해 주세요>를 먼저 읽고 보시면 더 좋습니다.
오래된 사진을 모아놓은 폴더에서 스크롤을 내리다가, 10년 넘게 보관만 하다 버리기 직전에 찍어 놓은 CD플레이어 사진을 발견했다. 내가 10대 초반에 이미 시대가 mp3 세상으로 바뀌었지만, 별났던 나는 음반을 모으고 CD 플레이어를 쓰는 걸 좋아했다.
방 안에서 시끄러운 락 음악을 귓 터지게 듣는 게 그때 나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아빠는 젊은 시절 모은 음악 테이프와 LP 판, 턴테이블을 계속 가지고 있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당시에 잘 팔지도 않는 CD 플레이어를 사달라고 했을 때 군말 없이 사줬다.
사춘기의 나는 아빠와 지독하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10살 때 벌어진 가정 폭력, 엄마의 부재, 아빠가 집으로 데려오는 아줌마들, 낯선 동네로의 전학,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환경에서 아이로써 당연한 힘듦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돌아오는 비난 폭격.
늘 마음이 조마조마한 어두운 아이로 중학교에 들어가며 방문을 잠그고 입을 다물게 됐다.
방문 밖에 있는 모든 시간은 하루하루 버텨내기 위한 전쟁터였다.
심지어 같은 집 안이라도.
그럼에도 겉으로는 학교에서 학원에서 항상 선생님들이 예뻐하고 착실하게 공부 잘하는, 멍청하게 착한 애였다. 하지만 아빠가 상관하는 것은 딱 하나, 성적표에 찍혀 나오는 숫자였다.
그래서 공부를 안 함으로써 반항했다.
한날 아빠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윽박지르며 CD플레이어를 내쪽에 집어던졌다. 벽에 맞은 파나소닉 CD 플레이어는 두 동강이 났다. 불만을 말하지 않으면 다른 것도 부숴버리겠다고, 이번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무 말이라도 해야 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고 싶다.'
방 안에서 홀로 세상을 배운 16살짜리 사춘기 중학생에게는 인생이 흔들릴만한 진지한 고민이었고, 두려움에 나온 깊숙한 진심이었다.
대답이 마음에 안 든 아빠는 더 크게 분노 발작을 했다.
그 말을 하며 16살짜리 아이는 무얼 바랬을까?
고개를 푹 숙인 나에게 우주 속에 혼자 내던져진 것 같은 공허함이 엄습했다.
외로웠다.
그때의 공허함이 31살이 된 지금까지 나를 둘러싸고 떠나질 않는다.
아빠에 대한 마음은 참 복잡하다.
본인 나름 나와 동생을 부족함 없이 키워내려고 갖은 애를 썼고 그래서 경제적으로나 뭐로나 다른 어려움 없이 자란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10대 때부터 도로 옆을 지나가면 차에 치이면 어떨까, 아파트를 올라가면 떨어지면 많이 아플까 고민이 되더니, 성인이 되어 중증 만성 우울증과 경계선 성격장애 진단을 받았지만, 뭐 '큰 어려움'은 없었던 걸로 치자.
누군가의 기준으로는 겨우 저 정도는 '감사'할 줄 모르는 나의 '무지'에서 나온 이기적인 '불평' 이니까.
복잡하다. 나를 키워준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그래서 모른 척 묻어 두고 멀어지기를 선택했다.
내 평생 동안 비난받아온 아빠의 말처럼, 이제 자신의 인생에서 꺼져줬으니 부디 행복하시길 바란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란다.
고요 씀.
* 이 글은 위윌 자조모임 정회원 고요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