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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Oct 22. 2024

水滴穿石,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꿰뚫을 때까지

<D.P.시즌2>의 수많은 얼굴들에 대하여

<D.P. 시즌 1>-이하 <D.P.1>-의 핵심은 병영 내 부조리에 대한 것이었다. 부조리로 인한 탈영병들과 무고한 젊은 목숨들의 희생, 방관하는 사람들의 책임.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도 있다. <D.P.1>을 통해서 현실의 조금 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악인을 만드는 군대의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시스템(구조)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D.P.1>은 구조에 대한 이야기까지 깊이 있게 접근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스템보다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로 분류되는 각 개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D.P.1>이 차기작에 비해 쉬운 길을 걸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인물간의 역학, 도식이 아주 간편하게 짜여 있다. 시청자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가해자를 엄중하게 내려다보고, 피해자를 동정하면 된다. 그리고 한편으론 방관자이기도 했던 한 시절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D.P.1>의 감상은 깔끔하게 정리된다. 


<D.P. 시즌2>의 매끄럽지 못함은 현실을 반영한 결과.

반면, <D.P. 시즌2>-이하 <D.P.2>-의 감상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결말까지의 과정은 요철로 가득하며, 결말에 이르러서는 결말에 이르지 못한 감상을 받게 된다. 그렇다. 현실은 깔끔한 서사로 정리되지 않고, 현실의 결말 역시 항상 어떤 깔끔하게 정리된 결말을 내놓지 못한다. 피해자인 작중 ‘김루리 일병’은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범죄자이기도 하다. 가해자 ‘황장수 병장’을 포함한 군내 폭행 가담자들은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범죄자이기도 하다.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나선 ‘박범구 중사’와 같은 소수의 중간 계급의 사람들은 언제나 순교의 피를 흘려야 하고,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나선 ‘안준호 일병’과 같은 계급이 낮은 인물들은 부정을 저지른 높은 계급의 사람들의 명령을 받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투쟁해야만 하며, 가해자의 부모와 피해자의 부모는 두 사람 모두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두 피해자는 서로의 상처를 공유할 수도, 연대할 수도 없다. 피해자들이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지도 연대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D.P.2>의 비극이 숨어 있다. 그리고, 시스템은 바위처럼 견고하고 그 두께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껍다. 아무리 수백번 계란으로 내려쳐도 표면이 조금 깎여나가기만 하고, 바위의 잘못된 형상 자체를 바꾸는 일은 요원해보인다.



가해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피해자

<D.P.2>는 이런 복잡한 인물 역학 위에서 쓰여졌고 악의 근원을 ‘국가’라는 작중 보이지 않는 시스템으로 겨냥했기 때문에, 전작보다 어려운 길을 걷는다. 작중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이 드라마는 이 복잡한 인물들의 내면과 관계 때문에 “가해자를 옹호한다”는 비판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우선, 김루리 일병의 경우 부대내 집단 따돌림과 가혹행위를 당했지만, 그가 부대원들을 향해 총을 쐈다는 점. 그로 인해 분명 장애 판정을 받은 이와 사망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김루리 일병은 분명 군대 비리의 피해자이면서 그보다 더 큰 죄를 지은 가해자가 된다. 


박성우 하사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는 아직 20대 초반의 젊고 철없는 군인이었고, 하룻밤의 직무 유기로 사람이 죽게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직무유기로 사람이 죽었다는 점. 그의 철없는 태도에서 그 역시 마찬가지로 가해자라고 할 수 있다. 나중석 하사의 경우 부대 내 가혹행위를 주도한 장본인이면서 부대에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지뢰때문에 사망한 지뢰 폭사 사고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드라마의 마지막에 등장한 황장수는 계속해서 가해자의 얼굴을 해왔고, 조석봉에 의해 납치 폭행을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선량한 시민의 얼굴을 한 채로 나타난다.



그들은 왜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었나.

황장수와 안준호.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한참동안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두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시선을 주고 받았을 지는 모른다. 하지만, 장수는 준호의 얼굴을 보며, 끝이라고 생각했던 과거를 앞으로도 몇번이나 계속해서 보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 암시에 그는 굳은 것이다. 장수를 우연히 보게 된 준호는 먼 길을 떠나버린 석봉과 먼 곳으로 끌려간 루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너무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장수를 보며 떠나보낸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관자이기도 했던 그 역시 장수만을 나무랄 수는 없었을 것이고. 두 사람은 동조자의 심정으로, 서로의 얼굴에서 서로의 죄의식을 마주했으리라.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을 품어볼만 하다. 20대 초반의 젊고 어린 청년들이 국민의 의무를 다한다는 이유로 최저시급도 못 받으며 서로를 향해 비난과 멸시 속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군부대 내 폭력의 위상학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만 할까. 그리고, 그 책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건 모두 이를 방치한 국가system의 책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대는 특성상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일 수밖에 없다. 그 점은 분명히 인정한다. 하지만, 그 조직의 목적이 국민과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수직성과 폐쇄성 역시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수직성과 폐쇄성은 국민의 안정을 보장할 때에만 용납이 된다. 이 수직성과 폐쇄적인 특성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서 악용될 때, 부대 내에는 온갖 비리가 들끓게 되고, 그에 의한 피해자가 속출하게 된다. 그리고 그 피해는 모두 오롯이 국민이 지게 되는데, 이때 피해자의 범위에는 루리, 석봉, 수까지도 포함된다.



문제는 시스템에 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군대의 내부 비리를 봐왔다. 내가 봐온 비리 장면들만 해도 적지 않다. 장병들에겐 국민의 혈세때문에라도 아파도 밥을 먹으라며 식사(食事:먹는일)를 강요했던 시스템이, 정작 부대 내 상급자가 방문할 때에는 하룻 밤에 수백만원의 혈세를 온갖 이유를 들어 우습게 태워버리기도 했다. 정시에 퇴근하면서 남들 모르게 연장근무를 꼬박꼬박 신청하는 지휘관도 있었다. 장병들은 수십년 전에 쓰던 수통을 쓰던 시절에, 신규 디지털 군복이 방산 비리 논란에 들끓는 와중에도, 그들은 안온했다. 하지만, 그게 과연 그들만의 문제였을까하는 고민을 붙여 본다. 문제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고착된 시스템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부대 내에서, 또는 우리 사회는 어디에서건 사건과 사고가 발생하면 언제나 누군가가 “옷을 벗는다”. 하지만, 담당자 또는 책임자의 옷을 벗기는 것은 시스템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것과 같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책임자와 담당자가 누구인가에 집중하기 보다 그 위에 어떤 시스템이 그들을 조종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그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군대는 그럴 수 있다는 생각, 또는 군대가 원래 힘든 곳이라는 생각, 버티지 못하는 게 이상한 것이라는 생각, 어느정도의 폭력이 필요하다는 생각, 어느정도의 수직적 관계가 필요하다는 생각. 어쩔 수 없다는 생각.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런 생각들이 시스템을 더욱 더 견고하게 만들고, 시스템에서 피해를 보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양산해낸다. 물론, 시스템은 오랜 시간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것으로 너무도 견고해서, 하루 이틀만에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사회를 향해서 비판과 자성의 시선, 그리고 위로와 관심의 시선까지. 진정한 사회 정의를 위해 구성원들이 정치 조직을 향해,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를 향해, 매서우면서도 상냥한 시선을 포기하지 않고 보낼 때, 피해자와 가해자를 양산해내는 이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水滴穿石(수적천석)

이와 관련해서, 마침 적절한 사자성어 하나를 말해보려고 한다. 작중에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피해자의 유족에게 국선 변호사는 그 일이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다고 말했는데, 나는 우리의 두드림이 계란보다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두드림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도 더욱 꾸준히 계속될 수는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 사자성어를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水滴穿石(수적천석), 작은 물방울이 오랜 시간 바위를 때리면 언젠가 바위에 구멍이 나기 마련이다. 저 견고한 바위를 꿰뚫을 때까지.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끊임없는 관심과 비판의 시선, 자성의 시선을 이어간다면, 언젠가 문제의 시스템을 꿰둟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노력으로, 조금 더 인간적인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 D.P. 시즌2, 2023,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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