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니까
쌀이 떨어졌다. 옷장 속, 옷들의 주머니를 정신없이 뒤졌다. 10원짜리 하나 나오지 않는다.
서랍과 책상, 돈이 나올 만한 곳은 죄다 찾았다. 없다. 돈이라곤 한 푼도 없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텅텅 빈 냉장고에는 얼마 남지 않은 김치가 전부였다. 반찬은 고사하고 쌀만 있으면 애들 밥이라도 먹일 텐데…….
남편의 사업이 망한 뒤 경매로 넘어간 아파트 대신 내게 남은 건 반지하 방과 이혼과 어린 두 아이들뿐이었다.
갑자기 닥친 불행에 나는 우울증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가정주부로 아이들만 키우며 살다 보니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세상도 무섭고 사람도 싫었다. 몇 년을 이 악물고 버텼지만 한계였다.
“죽고 싶어.”
아이들이 놀러 나가 아무도 없는 집. 옹색하고 구질구질한 삶은 비참하고 서러웠다.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엉엉!”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창자가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연신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칼날이 날카롭게 전신을 짓이기는 듯한 통증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만 원만 있으면 좋겠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만 원만 있으면……. 만 원만 있으면 쌀을 사서 애들을 먹일 수 있겠지. 그럼 당장 죽지 않아도 되겠지. 쌀 떨어질 때까진 또 견딜 수 있겠지.
좋은 집, 좋은 차, 넉넉한 통장…… 그런 사치 따위 더 이상 바라지 않을 테니 제일 적은 쌀 살 돈, 만 원만 주세요, 하나님. 아이들이 굶지 않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전 엄마잖아요. 다른 건 못 해줘도 밥은 먹여야 하잖아요.
끅끅거리는 울음이 잦아들 즈음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일곱 살 딸이 들어왔다,
“엄마!”
딸이 눈치챌까, 얼른 눈물을 닦고 현관으로 갔다.
“엄마, 이거.”
“뭔데?”
딸이 조막만 한 손으로 내 손에 쥐어준 건…… 꼬깃꼬깃한 만 원이었다.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파란 지폐를 보자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이거 어디서 났어?”
“친구랑 놀다가 계단에서 주웠어. 나 또 놀러 갔다 올게.”
딸은 제 할 일 끝난 듯 부리나케 달려 나갔고, 나는 멍하니 꼬깃꼬깃 지저분한 돈을 바라보았다. 누가 준 것도 아니고, 흘리고 밟은 돈이라니. 구겨지고 짓밟힌 만 원 지폐가 마치 내 자존심 같았다.
슈퍼에서 9천 원짜리 쌀을 샀다. 돈이 천 원이나 남았다. 반찬거리를 살 순 없었지만, 쌀을 품에 안고 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깟 구겨진 자존심. 애들에게 밥해 먹일 수 있다는 기쁨에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엄마니까.
쌀을 씻으며 뽀얗게 우러나는 쌀뜨물이 반가웠고, 전기밥솥에서 칙칙 밥 익어가는 소리가 정겨웠다. 사람 사는 집 같아서.
전기밥솥의 뚜껑을 열었을 때 윤기가 잘잘 흐르던 하얀 쌀밥. 뜨거운 김과 구수한 냄새. 밥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밥그릇에 가득 밥을 퍼담고 신김치를 상에 차려 아이들 앞에 내놓는 엄마의 마음.
“맛있어?”
“응!”
“반찬이 신김치밖에 없는데?”
“괜찮아. 밥이 맛있잖아.”
아이들의 해맑음은 엄마의 불행 그 너머에 있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맛있게 밥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오늘만큼은 불행을 넘어선다.
그렇게 매일 불행을 넘어 오늘까지 왔다.
아이들은 엄마의 불행을 뛰어넘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