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7시 반.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 그저 푹 쉬고 싶은 생각뿐... 인데 습관처럼 브런치에 들어와 금요일에 써놓은 글을 가다듬고 있다. 그것만 하고 자겠다는 마음과 달리 서랍 안에 제목만 덜렁 있는, 목요 글쓰기 수업 후기가 걸린다. 일요일이 가기 전에 얼른 써버려야겠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 점심때도 놓쳤다.
'아유, 배고파.'
이럴 땐 식욕도 없으면 좋으련만. 주방에 나와 냉장고를 뒤진다. 진짜 먹을 게 없네. 두리번두리번. 어제 택배로 온 고구마 상자가 눈에 띈다. 며칠 전 아들이 고구마가 먹고 싶다며 시킨 것이다.
'고구마나 구워 먹자.'
상자를 뜯으니 10개가량 들어 있다. 해남 고구마인데 큰 게 세 개, 나머지는 좀 작다. 5개를 깨끗이 씻어 반으로 잘라 오븐에 넣었다. 고구마는 오븐에 처음 굽는다. 고구마 전용 프라이팬이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버렸다.
오븐에 20분을 구웠는데도 자꾸 겉이 마르기만 하지 냄새도 안 난다. 할 수 없이 스테인리스 팬을 꺼냈다. 이 팬도 잘 쓰지 않는 거라 고구마 굽는 용도로나 써야겠다.
크고 멀쩡한 프라이팬은 달랑 하나. 쓰기 싫지만 어쩔 수 없지. 전에 쓰던 프라이팬을 괜히 버렸구나 싶어 후회스럽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이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달콤한 고구마 냄새가 솔솔 풍긴다. 그래, 이거지. 고구마가 익으며 치직거리는 소리에 군침이 돈다. 얼마나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쿡 찔러본다. 뻑뻑한 걸 보니 조금 덜 익었다. 자극을 받은 배가 욱신욱신. 아직 덜 익은 고구마 때문인지 달달한 냄새 때문인지 치직거리는 소리 때문인지... 무엇에 더 자극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ㅎ
그나저나 한겨울에 먹던 군고구마를 벌써 먹네. 갑자기 추워져 가을이 훌쩍 떠나버린 기분이다. 점점 가을이 짧아지는 건가? 이러다 가을도 사라지는 거 아냐?
계절 중에서 가을을 제일 좋아한다. 봄은 나른한 느낌이 싫고, 여름과 겨울은 너무 덥고 추워서 비호감이다. 가을은 공기도 맑고 기온도 적당하다. 가을 하늘의 청아함과 알록달록한 단풍의 신묘함과 운치 있는 낙엽과...
시인 같은 감수성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계절.
지구에 이상기온으로 점차 가을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게 슬프다. 가을이 길었을 땐 몰랐던 감사함이다.
곁에 있어서 소중한 줄 몰랐던 프라이팬, 가을, 예전에 이사하면서 버렸던 책들, 아이들의 어린 시절, 건강했던 몸, 추억, 꿈, 청춘,그리고 부모님... 또 뭐가 있더라?
작별 인사할 틈도 없이 지나가버린 나날들. 받은 상처는 징글징글하게 오래 기억하고 되씹으면서도, 정작 소중하고 감사한 것에는 인색하기만 우리의 모습이 참 부질없다.
고구마 하나에 잠시 피로도 잊고 행복할 수 있는데 너무 각박한 마음으로 살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코로나로 가을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시대가 와서야 비로소 사랑하는 계절을 아쉬워한다. 더 추워지기 전에 갤러리에나 가볼까?
예전엔 가끔 북촌 거리를 걷다 갤러리도 가고, 멋스러운 레스토랑에 앉아 스테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며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곤 했었다. 글 구상을 할 때도 있는데 , 그럴 때면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더 생동감이 넘치고 반짝거리는 느낌이었다.
인사동 단골집이던 경인 미술관과 개성만두 '궁'.
두 곳이 마주 보고 있어서 세트처럼 꼭 들르곤 했었다. 안 가 본 지도 3년은 되는 듯.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에서 마시던 쌍화차가 한약처럼 정말 진했는데... 손만두도 너무 맛있고. 그림 같은 풍경 속에 나를 담고 운치를 즐기던 그때가 요즘따라 더욱 그립다.
'바쁜 일상에 참 여유 없이 살았구나.'
나에게 너무 소홀했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혼자만의 나들이는 나만의 휴식 방법이다. 혼자 영화 보고, 근사한 곳에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책 보고, 구경하고, 쇼핑하고, 글 구상하고... 신경 쓸 사람도, 신경 쓸 일도 없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멋 부리고 여유 부리면서 충전하고 나면 복잡하던 머리도 피로에 찌들어 있던 몸도 개운해진다.
그땐 몰랐다.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의 감사함을.
코로나로 인해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보니, 마스크 없이 다녔을 때의 소중함을 알겠고, 여행을 다닐 수 있었던 때의 자유를 알겠다. 거리엔 온통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고, 지하철에선 핸드폰에만 시선이 꽂혀 있다. 사람들에게서 표정과 눈빛과 대화가 사라져 버린 듯 삭막하다. 점점 감성적인 것이 사라져 가는 세대. 미처 시선이 닿기도 전에 너무나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안타깝다.
코로나로 갑자기 세상이 바뀐 것처럼 우리는 또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가겠지. 작별인사를 할 새도 없이 떠나보내는 삶의 조각들이 얼마나 많을까. 함부로 다루지 말고 버리지도 말고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고구마를 구워준 프라이팬에게, 수명이 짧아진 가을에게, 나를 충전시켜주던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에게, 당연한 줄 알았던 자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