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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이조영 May 21. 2021

노오란 참외를 먹다가 울컥!

세상의 소리에 반하다 2

월요일 저녁 글쓰기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 

화곡역 4번 출구는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피로가 몰려오는 밤 11시. 3번 출구를 나설 때였다. 

저 멀리 골목 앞에 세운 트럭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트럭에 매단 전구에서 강한 빛이 쏟아지는데, 그 빛에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노오란 참외. 

4번 출구 쪽으로 돌아서 가야 함에도 이끌리듯 트럭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제철이 아니어서 시장에 갈 때마다 비싼 참외를 선뜻 집어 들지 못했다. 트럭에서 파는 거면 좀 쌀까? 

평소라면 피곤해서 그 밤에 무거운 참외를 사 들고 갈 생각도 안 했을 거다. 그런데 트럭 불빛에 노란색 참외가 시선을 끌더니 끝내 트럭 앞까지 이끌었다. 

트럭 앞으로 다가가자 아직도 참외가 가득한데, 제법 알이 굵고 싱싱하다. 

"다섯 개 만 원이 여덟 개 만 원!"

운동모자를 꾹 눌러쓴 30대 중반의 참외 주인이 큰소리로 외친다. 그러자 두 명의 여자분이 트럭으로 다가왔다. 

'만 원에 여덟 개면 싸잖아!' 

달달한 향에 침이 고이는데 냉큼 바구니를 가져다주는 아저씨. 

"어유, 마스크 썼는데도 단내가 나네요."

"예. 진짜 달고 맛있어요."

그때, 트럭 앞쪽에서 참외를 보고 있던 아줌마가 의심 가득한 어조로 묻는다. 

"아저씨, 이거 진짜 맛있어요?"

그 소리에 참외를 고르던 손길이 멈칫했다. 아저씨가 다시 후다닥 아줌마한테 달려갔다. 

"맛있어요. 절대 속이는 거 아닙니다."

"이런 건 어디서 갖고 와요?"

"제가 갖고 오는 데가 있어요."

몇 차례 미심쩍은 질문이 오가는 동안, 나는 신중히 참외를 하나하나 골라서 바구니에 담았다. 

가끔 너무 싸게 파는 트럭 과일을 샀다가 낭패를 겪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달달한 향내와 싱싱한 참외를 봐서는 아저씨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비닐을 갖고 온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언제 또 오세요?"

"어휴, 거짓말 아니고 진짜 맛있어요. 믿고 드세요."

아저씨의 눈빛이 어찌나 간절히 믿어 달라고 호소하던지 난처했다. 참외를 팔면서 손님들에게 의심을 너무 받았던 탓일까. 아저씨의 표정은 답답함과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내 마음 한편에 맛없으면 따지러 와야지, 하는 게 깔려 있진 않았을까. 나도 그런 의심의 뉘앙스를 품고 말한 건 아니었을까. 어차피 살 거 아무 말도 말 것을. 

미안함에 에둘렀다. 

"이 시간에 오시면 또 사려구요."

"언제 또 올지 몰라요. 물건 다 팔리면 그때그때 갖고 오는 거라."

"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묵직한 참외 봉지를 들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이 늦은 밤까지 먹고사느라 다들 힘드네.'

맛이 있거나 없거나 잘 샀다. 샀으니 된 거다.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을 거 같아서 전날 밤 냉장고에 참외를 넣어두었다. 

오후에 강아지와 산책을 다녀온 뒤 참외 하나를 꺼내 차가운 물에 싹싹 씻었다. 날이 더워 초여름 같은데 물기를 머금은 참외의 찬기가 손끝에 아리다. 칼로 참외를 길게 네 등분하여 껍질을 깎았다. 어느 틈엔가 강아지 '두부'가 발밑에 와 있다.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낼 때마다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같이 먹자는 간절함이 실려 있다. 전날 밤, 참외 아저씨의 간절한 눈빛이 생각났다. 

그런 눈빛인데 어떻게 안 사고, 어떻게 안 줘? 후후.

참외를 서걱서걱 씹어먹다가 하얀 부분만 잘게 썰어 한 조각을 두부 입에 넣어 주었다. 아삭아삭. 내 입에서도 강아지 입에서도 싱그러운 참외 소리가 난다. 

두부는 금세 참외를 삼키고 또 안달 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다시 한 조각을 입에 넣어주었다. 아삭아삭. 소리, 참 예쁘기도 하지. 

두부와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참외를 먹다가 문득 울컥! 명치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쳐 오른다. 

그동안 과일을 먹을 때마다 너무 무심했다. 이렇게 맛있는 소리를 왜 그냥 무심히 넘겼을까. 괜히 아저씨를 의심해서 안 샀으면 어쩔 뻔했어. 

생각해 보니 지레 그랬던 적이 많았다. 무심하고 의심하고 외면하면서 내게 온 수많은 순간을 놓치며 살았다. 

낑낑. 

참외를 먹다가 눈물이 핑 돌아 쳐다보고만 있는 내게 두부가 빨리 달라고 조른다. 한 조각을 입에 넣어주며 다정히 물었다. 

"두부야, 맛있어?"

너도 살아 있으니 시원한 참외도 사각거리며 먹는 거지. 살아 있는 건 좋은 거야. 이른 참외를 먹는데도 맛이 기가 막히잖아. 이런 세상에 살고 있구나, 우리가. 

입안 가득 퍼지는 달달한 참외 맛에 행복한 미소가 그려진다. 인생도 참외처럼 달달하고 시원하고 싱싱했으면 좋겠다. 강아지와 나눠 먹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듯, 내가 가진 걸 나누는 삶을 살아야지. 그냥 허투루 흘려보내는 감사가 없도록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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