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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이조영 Aug 05. 2022

나는 프로 경청러였다.

아버지는 남의 말을 안 듣기로 유명하다. 대화를 하면 90%가 말하는 쪽이다. 남이 말 좀 하려면 어느새 가로채 당신이 얘기를 하고 계신다. 아무도 아버지에게 대거리를 못할 때.

“내 얘기도 좀 들어! 어떻게 당신은 당신 말만 해!”

울화통을 터뜨리며 일어나버리는 엄마. 그런 엄마가 잔다르크처럼 용감해 보였다.


엄마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5분도 못 가서 이야기를 가로챈 아버지는 나름의 확고한 판단과 함께 결론을 짓곤 했다.

“이건 이래서 이렇고, 저건 저래서 저렇고~”

엄마의 감정은 깡그리 무시한다.

“저 봐라, 또! 또 자기가 판단한다. 누가 판단하래! 이야기를 좀 들으라고!”

또는, “됐어, 말 안 해!”로 대화는 중단되기 일쑤.

두 분을 보고 있노라면, 둘이 부부로 오랫동안 사는 게 기적이다. 아버지가 말하면 엄마는 듣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젠 지쳤는지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아버지 때문에 내쉬는 한숨은 변함이 없다.

필사적으로 말하겠다는 사람과 필사적으로 안 듣겠다는 사람의 전쟁. 총알만 빗발치지 않다뿐, 소통의 난항은 살아가는 내내 전쟁 같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와 대화하면 서너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물론, 듣는 쪽은 나다. 여전히 아버지는 대화의 90%를 차지한다. 상대가 말하는 걸 못 참는 사람처럼.

아버지는 끝없이 말하고, 나는 끝없이 듣는다.

오히려 자리에 없던 엄마가 와서 “뭔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해?” 한다.

예전엔 몰랐다. 내가 프로경청러라는 걸.




나처럼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이 어떻게 심리상담사가 되고 코치가 되었을까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인간관계 중심도 아니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의논할 때가 많았다. 나는 또 그게 신기했다. 다정다감한 성격도 아니고 남들에게 흔한 위로의 말도 잘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습관 때문이었을까.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고 답답하다. 아버지를 봐도 그렇다. 내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유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길고 긴 이야기는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다. 항상 같은 레퍼토리를 같은 톤과 억양으로 습관적인 어투를 넣어 말씀하신다. 그때마다 고장 난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더 듣게 된다. 나밖에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해드릴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애교 많고 살가운 딸이 아니었기에, 말하기 좋아하는 아버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최선이었다. 언젠가는 여든이 넘으신 아버지의 살아생전 목소리가 그리울 때가 올 테지. 그리 생각하면 고장 난 라디오라도 따뜻한 추억이 되고 만다.




남의 말 들어주는 게 직업이 된 이후로는 오히려 사적인 이야기에 귀를 닫게 된다. 타인의 말을 너무 많이 듣다 보니 정보의 호수 속에 빠진 것처럼 쉬이 피로하고 지친다. 흥미롭고 재밌는 주제도 아니고 부정적인 이야기가 많기에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 가끔은 내 이야기는 누가 들어주나? 외롭고 쓸쓸할 때도 있다.


그럴 때 글쓰기가 큰 도움이 된다. 그때는 순전히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고, 그렇기에 자정과 치유가 가능하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말하기 좋아할수록 글을 쓰라고 권하고 싶다. 많이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글을 쓰는 건 내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타인의 글을 읽는 건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가 할 말은 글로 쓰고, 남이 하는 말은 눈으로 읽기. 경청도 쓰고 읽는 습관에서 만들어진다. 판단은 금지. 오롯이 감정에 귀를 기울일 것.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감정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다. 감정이 무시당한다 느껴지는 순간 트러블이 일어난다.

진정으로 인간관계가 좋아지고 싶다면.

침묵하라. 그리고 경청하라.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경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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