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버닝(2018)

메타포 투성이. 그래서 '작품'이 되는 영화

by 예은

이창동 감독의 신작.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칸 영화제 초청. 수많은 타이틀과 함께 이 영화는 개봉 이전부터 크게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였다. 사실 어떻게 보면 관심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는 영화다. 그래서 보기로 했다. 사실 나는 영화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예술 영화를 많이 관람한 편도 아니라 상업영화가 아니면 약간 주춤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수많은 타이틀들이 나를 영화로 이끌었다. 그렇게 영화를 봤고, 이 영화는.. 글쎄... 생각할 점도 많고, 생각한 점도 많고, 생각하지 못한 점도 많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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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이 다 메타포인 것을...


영화의 중간 즈음이었을까. 문뜩 '메타포'라는 단어가 귀에 꽂힌다. 메타포.. 메타포는 우리말로 '은유'다. 직접적으로 A와 B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하지 않지만, 은연중에 이를 드러낸다. 한 장면, 심지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힘든 장면에서, 딱 한번 언급되는 이 단어가 끌리는 이유가 뭘까. 나는 그 이유가, 영화가 메타포 투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주인공인 '종수(유아인)'부터가 나에게는 메타포로 다가온다. 문예창작을 전공한 그는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 자신의 이야기 같아서 좋아한다. 실제로 포크너의 소설 <헛간 방화>는 이 영화의 원작이 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 영향을 준 책이기도 하다. <헛간 방화>에서 주인공은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두고 있는데, 듣다 보면 생각나는 것은 '종수'이다. 이렇게 이 영화에서 종수는 단순히 그냥 '종수'가 아니다. 그는 어쩌면,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아버지의 아들이자, 가난한 시골사람, 그리고 피폐한 20대 청년이다. 이 모든 것이 '종수'라는 하나의 단어에 담긴다.


또한 그는 '벤(스티븐 연)'을 보고 '개츠비'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으로 미지의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이다. 종수가 포크너의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벤은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주인공인 셈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소설 속 이름 하나를 툭 던질 뿐이다. 그리고 이 이름들은 주인공들을 한 단어로, 하지만 가장 또렷하게 설명해준다. 그렇게 그들은 이 영화에서 메타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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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를 '태우다(Burning)'


이 메타포로 뒤덮인 영화에서 그중 가장 중요한, 가장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메타포는 '비닐하우스'인 것 같다. 영화에서 벤은 종수에게 자신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한다. 텀은 한 2달 즈음. 이제쯤 2달이 되었으며, 종수를 만나러 오는 길에 이미 타겟을 정했다고 얘기한다. 그날 이후 종수는 매일매일 비닐하우스를 확인하지만, 비닐하우스는 모두 멀쩡하다. 하지만 종수의 이러한 의아함에 돌아온 벤의 답은 "태웠다"는 것. 그리고 그즈음 종수의 친구인 '해미(전종서)'가 사라진다.


이 순간 오만가지 의문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벤이 정말 비닐하우스를 태우긴 한 걸까? 아님 벤이 태우는 것이 '진짜' 비닐하우스일까? 혹은 '비닐하우스'로 비유된 무엇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비닐하우스 안에 '무언가'를 함께 태우지(burning) 않았을까? 마치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종수가 차량을 '무언가'와 함께 태운(Burning)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이 수많은 질문에 대해 답해주지는 않는다. 숨겨져 있는 진실을 찾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메타포란 그런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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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의 제목인 '버닝(Burning)'도 메타포가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는 '버닝'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벤의 취미가 그랬고, 종수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랬으며, 결국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실제 '버닝'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버닝'이 단순히 불로 어떤 물건 같은 걸 태우는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영화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실제 버닝의 장면에서 종수가 태운 것은 비단 자동차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 안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열등감, 사회에 대한 무력감, 분노 등을 함께 넣어 태워버렸다. 감정을 소모하듯, 혹은 분출하듯. 이는 그의 아버지가 분노를 표출한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방법의 차이일 뿐.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울 때면 심장에 베이스가 울린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삶에서 받는 수많은 감정들과 스트레스를 다 태워버리면서, 다시금 2달을 버틸 힘을 가지는. 그래서 심장에 베이스가 울린다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에 벤이 자신을 향해 '버닝'하는 종수를 끌어안은 것이 아닐까.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버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결국 '버닝'도 Burning이 아니다. 정말 영화 제목에서부터 장면 하나하나가 다 메타포다. 정말 메타포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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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로 만들어지는 '작품'


이러한 메타포가 이 영화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메타포는 작품에 뜻을 숨겨 독자로 하여금 찾게끔 한다. 마치 보물 찾기처럼.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이야기 곧곧에 숨겨놓은 보물들이 바로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접하게 되는 우리는 보물 찾기를 하듯 이 메타포들을 쏙쏙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개중에는 보물 찾기를 잘 하는 사람이 있어 모든 보물을 빠르게, 그리고 손쉽게 찾는 사람도 있겠지만, 서투름에 힘겹게 몇 개를 찾아내고는 이내 다 못 찾고 보물 찾기가 끝나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핵심은 보물 찾기는 보물을 숨기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모두 필요하다는 점이다. 보물이 숨겨져 있지 않다거나, 숨겨져 있다한들 찾아줄 사람이 없으면 보물 찾기는 완성되지 않는다.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미를 불어넣는 사람, 그리고 그 의미를 찾는 사람 모두가 있어야 진정한 '작품'이 된다. 피카소의 그림을 피카소 혼자 쳐다본다면 이 그림이 과연 '작품'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영화도 똑같다. 감독은 메타포를 써서 영화의 의미를 여기저기 숨겼고, 관객은 찾는다. 두 행위자의 하모니로 영화는 비로소 '작품'이 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보면, 영화의 극적인 호불호가 이해된다. 다시 한번 보물 찾기로 설명해볼까. 보물을 쉽게 찾는 사람은 보물 찾기가 재밌겠지만, 보물을 잘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보물 찾기는 곤역일 수도 있다. 또 찾은 보물이 내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에 따라서도 보물 찾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메타포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의 메타포를 쉽게 이해하고, 그 메타포가 가지는 의미가 취향에 맞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하나의 수작, 혹은 그 이상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그런, 혹은 그보다도 못한 영화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감히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 시적 장치만 잔뜩 넣은 시가 명시가 아니듯, 그리고 이에 대한 취향에 위아래가 존재하지 않듯, 메타포의 이해 유무가 관객의 수준을 좌우할 수는 없다. 그냥 이건 취향의 문제다. 보물 찾기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취향이듯. 그러니 이 영화의 호불호에 대해선, 그저 자신이 직접 보고 느껴보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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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아쉬움. "해미"


해미가 이처럼 이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이라는 의견에 물음표를 던질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미라는 캐릭터가 다른 두 남성 캐릭터에 비해 소홀히 대해지는 것 같아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해미는 종수와 벤을 만나게 해줬으며, 종수가 burning을 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끝이다. 해미는 두 남성 캐릭터, 특히나 '종수'라는 메인 캐릭터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도구'의 역할을 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않는다. 춤으로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거나, 두 남성의 싸움 아닌 싸움의 원인이 되지만 이마저도 사실 부차적인 역할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종수의 '버닝'도, 벤의 '버닝'도 얘기되지만, 해미는 그렇지 않다. 그저 해미는 "연기처럼", 혹은 "노을처럼" 사라져 버린 '버닝'의 도구일 뿐이다. 해미는 버닝 하고 싶은 게 없었을까? 왜 해미의 '버닝'은 다뤄지지 않는 것일까. 언제까지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의 변화를 야기하는 매개체, 혹은 도구의 역할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감독의 이전작인 <밀양>에서의 전도연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런 건지. 같은 감독의 이번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여성 캐릭터마저 이렇게 다뤄지는 점은 나에게는 크게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물론 원작이 있는 영화이고, 원작과 많은 차이를 만들기 어렵다고 하지만, 아쉬움은 아쉬움이다.




정말 어려운 영화였다.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이라는 게 순식간에 이해가 된다. 재밌게 봤지만 왜 재밌었는지 형언하기 어렵다. 나에게 이 영화는 메타포 투성이라 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 이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굉장히 긴 호흡으로 이루어지는데, 나는 이것이 관객이 메타포를 곱씹어 보게끔 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관객과의 소통, 혹은 대화를 통해 이 영화는 '작품'이 된다. 다만 하나의 아쉬운 점은, 유일한 여자 주연 캐릭터인 해미다. 여러모로 생각한 점도, 생각할 점도, 생각 못한 점도 많은 영화였다.


나의 별점 : 4.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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