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으로 빚은 내 생애 첫 땅
인심은 곳간에서, 땅은 빚으로부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그런 작은 땅을 갖고 싶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지은 집이었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병으로 서울에 사둔 집을 팔고 외할머니집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학교 2학년 여름에 이사를 나왔으니 나의 유년의 기억은 온통 등대가 있는 산중턱 거기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눈앞에는 동해바다가 쫙 펼쳐졌다. 가끔씩 놀러 오는 친척들은 너무 좋은 곳이라며 입을 댔다. 너무 좋은 곳이라면 이곳에서 살지 왜 다 떠나갔느냐는 생각은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다. 우리 집을 제외하고는 동네 사람들은 어업에 종사했다. 고기잡이 배의 선주, 선장, 기관장부터 어판장에서 생선을 다듬는 일을 하는 아주머니들, 횟집에서 일하는 친구 엄마, 명태 덕장을 하는 친구 아빠, 냉동 창고를 운영하는 친척 등 죄다 바다로 밥 벌어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한 번씩 해일이 일어나거나 태풍이라도 불어닥치면 밤새 파도소리와 바닷바람 소리로 요란법석이 났다. 그러다 눈을 뜨면 고요한 아침이다. 학교 가는 길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난다. 동네 아저씨들이 같이 탄 배가 전복되어 다섯 명이 하루아침에 돌아가셨단다. 바다로 밥 벌어먹고살다 바다 때문에 죽어가는 이들이 참 많았다.
바다가 삶의 터전인 자들에게는 바다는 낭만을 감춘다. 가끔 보는 바다와 바다에 온갖 희로애락이 있는 삶의 차이는 가끔 보는 연인 사이와 결혼해서 자식 낳고 지지고 볶는 부부 사이와 비견 닮아 있지 않나? 어디에서 어떻게 살지는 개인의 선택이겠거니와 요즘 젊은이들은 현명해서 결혼도 안 하고 바다 곁에 살지도 않으니 선견지명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하여 나를 키운 팔 할의 바다에 대해 언제나 애증의 감정이 있다. 그립고 애잔하지만 바다 곁에 살지 않는다. 도시에 살고 주말에는 산으로 둘러 쌓인 곳에 세컨드하우스를 지어 산을 보고 산다. 무엇 때문일까? 결핍의 일종일까? 그래, 그 결핍이라면 바로 땅이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개인 소유의 땅이 거의 없다. 우리 집도 외할아버지가 지으셨으니 당연히 할아버지 땅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일대의 땅 주인은 다 따로 있었다. 일제치하에 집을 짓고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은 점점 산자락의 낮은 곳에서부터 뒤로 뒤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게 누구의 산인지 알았겠냐만은, 나중에 알고 보니 산 주인의 명의는 따로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나에게도 참 허무했다. 집은 오래되고 무너지면 그만인 것을, 부수면 그만인 것을! 땅이 중요하다는 것을 유년기에도 알았다.
게다가 바닷가 사람들은 땅은 없어도 배는 하나씩 있다. 그런데 땅값은 계속 오르지 않나? 물론 배 가격도 계속 오르긴 하겠지만, 배는 유지 관리비가 계속 든다는 사실, 그것이 부동산과 동산의 차이가 아닐까?
누군가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보고 느낀 바로는 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바다는 모두의 것이고, 땅은 내 것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 땅 없는 설움으로, 땅에 대한 막연한 욕심과 수많은 결핍이 나를 땅으로 이끌었다.
허나,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땅을 사겠는가? 구차하게 당시 내 자금 사정은 말하면 입이 아파서 했다 치겠다. 돈이 없어도 땅을 살 수 있다는 배짱 하나는 두둑했다. 결혼 전에는 돈이 없어도 세계 여행을 그리 다녀서 이모에게 혼나고 뒷말 들은 적도 많다. 남들의 이목이 중요했던 20대도 아닌 40대에, 더 이상 남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돈 없이 땅을 샀다.
나의 미래 자산을 당기자. 내 비록 지금 돈은 없지만, 미래에는 돈이 있겠지? 무슨 소리인가. 그래, 신용대출과 받을 수 있는 대출은 다 끌었다. 저금리 시대였던 당시에는 대출이 지금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인 땅을 사는 것은 빚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빚으로 아름답게 빚은 내 인생 첫 땅! 그곳에서 인심이 나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