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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다른 양양 Sep 30. 2021

요리는 할 줄 알아?

서른다섯. 이제야 독립합니다.

"밥은 먹고 다니니? 요리는 좀 할 줄 알아?"


역시 제일 걱정을 많이 하는 게 '밥을 먹는 일'이었던지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말들을 엄청 들었던 것 같다. 도대체 내가 온실 속에서 자라난 꽃도 아니고 나이가 몇 살인데 밥은 할 줄 아냐, 라면은 끓여봤냐, 매일 사 먹는 거 아니냐 등등 뭐 이런 말들을 해서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건지 살짝 헷갈릴 정도였다. 


오랜만에 삼촌이 한국으로 오셔서 식사를 하는 날에도 동생이 나에게 물었다. 

"언니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요리는 좀 해?" 

"응 나 되게 잘해먹고 있어. 김치랑 반찬도 만들어먹고 밥도 해 먹고."


내 대답이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던지 동생과 숙모가 "그래?" 하고 되묻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싶을 때 삼촌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엄마가 아플 때 은영이가 살림을 맡아서 한지 2년이 넘었잖아. 어릴 때부터 엄마가 시키고 그러지 않았어?" 삼촌이 말씀을 하시는데 어릴 때 엄마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나서부터는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연습을 시켰다. 엄마가 없을 때 뭐라도 할 줄 알아야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면서 간단한 집안일부터 참여시키기 시작했다. 엄마는 손도 빠른 편이고, 음식도 끝내주게 맛있다. 외할머니, 친할머니도 요리를 잘하셨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먹어보는 경험만으로도 좋았는데 엄마는 항상 "해볼 줄 알아야 해. 언젠가 내가 없고 네가 해야 될 때 꾸준히 자주 해 먹어 봐. 요리는 금방 늘 거야."라고 말하면서.


어차피 라면은 끓일 수 있고, 밥은 밥솥이 해주니깐 뭐 굶어 죽을까 싶기도 했는데, 엄마의 훈련 덕분인지 아니면 엄마, 할머니들 모두 요리를 잘하시니깐 나도 기본은 하겠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인지 몰라도 무언가를 해 먹는 것에 큰 불편함이나 어려움 없이 잘해 먹고살고 있다.


정말 진지하게 말하지만 난 정말 너무 잘해먹고 산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며칠은 정말 커피만 마시면서 살았다. 친한 친구들이 삼계탕이며 죽이며 계속 사다 주고 배달로 보내주고 했는데 음식이 입에 아예 안 들어가서 커피만 마시다 탈이 나서 결국 뭘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집에서 만들어먹을 에너지도 없어서 회사에서 나오는 식사가 전부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냉장고 속 사놓은 재료들을 둘 수 없어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먹지 않으니 만들어놓은 반찬들도 버리고 냉장고는 텅텅 비어졌다.


그러다 남아있는 '배'가 보였다. 시간이 좀 지난 상태이니 먹기엔 좀 그런데 버리긴 아까운. 뭘 해볼까 싶다가 잼으로 만들어버리기로 하고 레시피를 검색하고 만들어본다. 그런데 만드는 과정 동안 집중하는 시간이 너무 좋다고 느껴졌다. 아무 생각도 안 들고 해야만 하는 일만 생각하니 복잡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만든 잼은 친구들과 나눠먹었는데 반응도 좋아서 오랜만에 기분이 굉장히 좋았던 기억이 있다.


한식 사진은 도대체 찾을 수가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해 먹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동안 집에서 금기시되어있던 맥주도 좀 사놓고, 먹고 싶은걸 마트에서 한가득 사 와서 쌓아놓고 먹기도 한다. 앙꼬의 간식도 채워 넣고 앙꼬와 자유의 시간을 즐겨본다. 매일 같은걸 먹을 수 없으니 레시피도 찾아보는데 내가 제일 도움을 많이 받았던 건 유튜브에 있는 브이로그였다. 잘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서 나도 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기도 했고, 간편하고 실생활에서 먹는 그들의 레시피를 따라 해 보면서 새로운 식재료도 써보고 해 본다. 


좋아하는 식재료, 양념의 종류도 좀 더 세세해지고 취향도 좀 더 명확해진다. 전에 좋아하지 않았던 음식을 좋아하게 되기도 하고 한마디로 재밌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밥 해 먹는 게 귀찮은 일이기도 한데,  아마도 음식을 만들 때는 집중을 하게 되다 보니 잡생각도 없어져서 그 방법 자체가 나에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밥을 해 먹는 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자신을 소중히 여길 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해요."



엄마가 휠체어에 앉기 시작한 언젠가 졸려 죽겠다는 나를 굳이 깨우더니 냉장고 정리를 시켰다. 오랜만에 자고 싶었던 나는 투덜거리면서 엄마의 지시 아래 버려야 할 것들과 살려야 하는 것들을 구분하고 하나하나 닦고 치우고 있는데 엄마가 이런 말을 한다.


"앞으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지 말고 해 먹어 봐. 그동안 엄마가 너한테 이것저것 시킨 것도 다 이럴 때를 위해서였어. 요즘 엄마한테 밥해주는 거 보니깐 자주 만들고 하면 금방 늘겠더라. 


먹고 싶으면 스스로 해 먹는 것도 좋은 거 같아. 내가 나를 위해 맛있는 걸 해 먹고 그 과정을 즐기면 요리도 생각보다 재밌어. 나는 시집와서 처음 요리를 시작했는데 네가 잘 먹을 때 그렇게 좋더라고. 그러니까 너도 해 먹어 사 먹지만 말고." 


밥을 해 먹는 게 뭐라고 그럴까 싶었는데 역시 엄마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엄마랑 비슷한 점도 많이 발견했다. 누가 엄마 딸 아니랄까 봐 살림 욕심이 좀 있다. 예쁜 그릇 보면 사고 싶고 그릇 매장 가면 그렇게 힐링이 된다. 전에는 엄마가 그러면 잘 이해를 못했는데 내가 요즘 그러고 있는 걸 보니 닮긴 닮았나 보다 싶어서 웃을 때도 있다.


어릴 때부터 무슨 전쟁이라도 날듯이 이것저것 해봐야 된다고 시키던 엄마의 모습이 요즘 생각해보면 감사한 마음이 든다. 걱정과 다르게 잘 먹고 잘 살고 있고 나름의 힐링 포인트도 찾아서 즐기고 있으니 엄마가 안심하지 않을까 바라본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가 스스로 밥을 해 먹는 거라고 하니 난 나를 정말 엄청 많이(?) 사랑하고 있다. 


그러니 모두들 걱정은 이제 그만 해주세요! 

제 나이가 몇 살인지 아시잖아요. +ㅁ+;;


다시 한번 진지한 궁서체로 말하지만 

정말 잘해 먹고, 살고 있어요. 


가끔 엄마가 해준 밥이 그립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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