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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다른 양양 Dec 01. 2021

가장 힘든 건 아무래도 '사람'.

서른다섯. 이제야 독립합니다.

삶이 뒤집혔다는 말.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말을 실감했던 건 4년 전 겨울. 엄마와의 이별 때문이었지만 그 외에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생각해보면 그건 사람들이 생각 없이 내뱉는 말과 행동들이었다.


혀가 칼보다 잔인할 수 있다. 

이 말을 뼈저리게 실감하기 시작했다는 건,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 약한 부분이 노출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함이 드러난다는 것. 


약함을 인정하고 드러나는 건 어쩌면 스스로에게는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잔인하게 그 상황들을 이용하려고 혈안이 된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약함은 숨기는 게 좋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슬픔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실 어릴 때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서로를 돕고, 공감하며 사는 것이 좋은 세상이라 배웠던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결국 수긍하게 된 건 여러 경험을 하면서였고,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나이가 먹을수록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사람에게 기대가 적다는 것이 슬픈가? 하지만 이게 현실이라는 걸 이제는 잘 알지 않은가?




엄마를 잃은 내게 사람들은 참 잔인했다.


보호자가 없어진다는 것. 그래 그 큰 우산이 없어진다는 것이 어쩜 마흔을 앞둔 이 나이에도 이렇게나 서러움을 느끼게 되는 일인지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그 서러움을 느끼게 한건 먼저 간 엄마도, 슬픔에 빠진 나도 아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걸 상대방이 갖고 있지 않거나 잃어버렸을 때, 제대로 된 위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무조건적인 동정과 "불쌍하다."라는 말. "아마 이럴 거야."라는 식으로 경험해보지도 않은 일을 안다는 듯이 훈계와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못난 마음들.


이런 못난 마음들을 가진 이들이 "걱정"이라는 말로 포장하며 다가와 진을 빠지게 해 놓고선 자신들이 누군가를 위로했다는 행위에 대한 만족감으로 뿌듯해하기도 했고, "걔네 엄마 루게릭으로 돌아가셨데. 유전인가?"라는 말로 우리 엄마의 죽음을 가십거리로 만들어버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고민을 이야기하면 "네가 참아. 정말 네 주변은 사람들이 이상해."라고 말하더니 좋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면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동의 없이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하고는 자신이 속해있는 어느 공동체로 들어오라고 하질 않나, 건강이 걱정된다면서 이걸 먹어보는 게 어떠냐는 식으로 갑작스레 무언가를 사라고 하거나, 가입하라고 하는 어이없는 장사꾼들.


"아파서 입원하면 엄마도 없는데 혼자 아프겠네.", "잘했으면 뭐해. 결혼을 안 한 게 너의 제일 큰 불효일지도 몰라.", "너네 엄만 왜 그런 병에 걸려서 죽니 찜찜하게."라는 말을 하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사람들까지.


참 어이없게도 이 모든 것에 깔려있는 마음이 "너를 걱정해서."라는 것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어이가 없었고 그들의 삶이 진심으로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궁금하다.

 

내가 갖고 있는 걸 누군가가 갖고 있지 않는다는 기준만으로 "불쌍하다."라고 말하는 게 과연 맞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열등감의 표현일까? 철없는 10-20대도 아닌데, 정말 저게 위로라고 지껄이고 있는걸 스스로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무식함을 자랑하고 싶은 건지 너무 궁금하다.




어느 날 내 걱정을 엄청 하던 친구라 불렸던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 너무 재수 없어. 그렇게 슬픈 일을 당했으면 울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 아니니? 넌 항상 그렇게 덤덤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게 너무 재수 없어."


이 말을 들은 이후로 간신히 버티고 사는 내가 덤덤해 보인다고 재수 없다고 말하는 게 과연 나를 위한 걱정인가? 자신을 위한 걱정인지 알 수 없어서 그 사람과 연을 끊었다. 


또 한 친구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얘는 사연이 너무 많아요. 어머님이 몇 달 전에 희귀병으로 돌아가셨거든요."라는 말을 했다. 이 나이에 엄마가 돌아가시는 게 사연이 많은 거면 그대의 세상은 얼마나 안락해서 사연이 많다고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스스로의 무식함과 공감능력이 없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던 건지 파악이 안돼서 그 사람과도 거리를 두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2주 만에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말로 시작해서 왜 우냐. 나이가 몇인데 슬퍼하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왜 그렇게 좌절하냐고 말을 하는데 부모님과의 이별조차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함부로 말하는지 나는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 정말 쓰레기 같았다.


경험을 해야만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나이가 서른이 넘었으면 배려라는 걸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야 될 나이가 아닌가?


어느 누군가는 내 주변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내 잘못이라 했다. 내가 받아줘서, 내가 지금껏 넘어가서 우습게 아는 거 아니냐는 말들과 함께.


그 의견(?)을 듣고 그 사람들에게 되물었다.  "당신도 나를 우습게 보는 건가요?"라고. 그러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이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 걱정일 뿐이라고 하면서. 하지만 결국 내 눈엔 다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이게 왜 내 잘못인가? 


그 사람들이 개념이 없고, 감정에 공감할 수 없고, 누군가의 약함이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이 예의가 없는 것이고 나이가 이렇게 되도록 자라지 못한 사람들인 것을. 그게 왜 내 잘못인지 알 수 없다. 


결국 예의가 없는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 걱정이라는 것은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조금씩, 천천히 그런 사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말을 해봤자 들어먹을 귀가 없을 것이고, 화를 내봤자 피곤하기 때문에 천천히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먼저 눈치를 채고 자신의 말에 대한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은 내 브런치 글을 보고 "도대체 누구니? 그런 사람들이 있어?" 라며 화가 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속으로 말한다.


"그게 너야."라고.


나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그들을 내 인생에서 지우기 시작했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내 관심과 걱정을 쏟지도 않고, 그들의 무식함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지금은 만족스럽다. 그들을 내 인생에서 내려놓고 빠지게 하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을 사람들. 걱정이라면서 제대로 얼굴 한번 들여다볼 마음 없는 사람들. 우리 엄마의 죽음과 병을 가십거리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가 있다면.


그대들이 있어 내가 조금 더 냉정해졌고, 이제 내 사람들이 누군지 알며 그대들의 열등감을 푸는 대상에서 내가 빠질 수 있게 되어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됨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대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


그대들이 나를 부러워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대들은 가질 수 조차 없었던 나와 엄마의 끈끈한 관계. 그대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던 우리 엄마의 자유로움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 모두를 부러워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대들에겐 살아있는 부모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녀처럼 될 수 없다는 것, 아직도 부모님과의 관계성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그대들에게 불쌍하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나는 이제 엄마와의 시간이 끝났고, 후회가 없지만 그대들은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데 뭐가 문제인가? 


당신도 알겠지만, 난 사람에게 '불쌍하다.'는 표현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말해야겠다. 


나는 당신이 참 불쌍하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그나마 지금 당신 옆에 남아있는 그대들의 연인이던, 친구, 가족을 잘 지키길 바란다. 아니면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빌기라도 하던가. 무식함을 자랑하지 말고 멋지고 현명한 한 사람이 되길 정말 진심으로 바란다.



언젠가 엄마가 그랬다.


"사람에게 시련이 있어 무언가를 경험하게 되는 건, 그 경험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해주고 공감해주라는 하나님이 뜻인 거 같아. 엄마도 아파보니 보이는 누군가가 생기고 쉽게 지나치기 어려워지더라. 그래서 세상이 조금은 살만한가 봐. 아무것도 경험해보지 않은 건 자랑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모르는 게 많은 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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