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다른 양양 Nov 19. 2021

냉장고 지분 100%

서른다섯. 이제야 독립합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제일 즐거운 일 하나가 바로 장을 보는 일이다. 사실 장 보는걸 이렇게 즐기게 될 줄은 나도 몰랐는데, 매주 장을 보고, 구경하는 걸 좋아하게 된 이유는 냉장고 지분 100%를 갖게 되서이지 않을까 싶다.


엄마랑 함께 살 때는 냉장고는 항상 엄마의 것. 술을 마시지 않는 우리 집에서 맥주 한 캔 사놓을 수 없는 분위기와 달고, 맵고, 짜고 이런 것들도 엄마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항상 엄마가 해놓은 반찬과 야채로 풍성했던 냉장고였기에 사실 장을 보던 뭘 사던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냉장고 지분이 100%를 갖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장을 보는 것에 진심이 되면서 매우 즐거워졌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은근 이런 것에서 혼자 사는 즐거움을 누리는 중이다.

 



이것저것 사보고 있는 것들과 늘어난 맥주


제일 달라진 냉장고 풍경은 바로 커피와 맥주가 가득해졌다.


새로운 공간에서 시작된 혼자 살기가 아니다 보니 주방도 엄마의 살림 그대로 물려받은 거나 다름이 없어서 살 것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건 있어야 해! 하면서 내가 산 가전제품이라곤 캡슐 커피머신, 미니오븐 정도. 


한식 위주에 식사를 하던 엄마와 다르게 빵과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 집에서도 즐기기 시작했고 커피를 좋아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여러 가게의 콜드브루를 사서 마셔보는 재미도 추가되었다. 그래서 냉장고에 커피가 좀 있다. 


그리고 바로 맥주. 사실 엄마 아빠 모두 술을 즐겨마시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빠는 양주 한두 잔 정도 마시는 게 내가 본 전부였고 (물론 밖에서 드시고 오는 건 긴말하지 않겠다. 아빠들은 왜 술을 드시고 들어오면 자는데 깨워서 쓰담쓰담을 하는 것인지....) 엄마도 술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니 뭐 냉장고에 술이 있을 리가. 

하지만 이제 냉장고 지분 100%를 가진 자인 나는 맥주를 사서 채워놓기 바쁘다. 요즘은 수제 맥주를 많이 접할 수 있어서, 어딘가에서 수제 맥주를 발견하면 한 두 캔 사놓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원래 부어라 죽어라 마시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정말 딱 기분 좋게 한두 캔 마시고 자는 정도. 주말에 일주일 잘 보내고 먹는 혼맥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두 번째로 많아진 건 빵이다. 

빵 종류가 냉동고에 가득 해진 건 여기저기 맛있다는 빵을 택배로 주문해서 먹어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이글, 식빵, 생지 등 SNS를 통해 유명한 곳들. 맛있다고 소문난 곳들의 빵을 먹어보는 재미도 생겼다. 아마 엄마가 알면 기절하겠지만, 뭐...+_+ 즐거운 일이다.




물론. 냉장고 지분 100%가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사실 처음엔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았던 것 같다. 마트가 저렴할 때도 있는데 그만큼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을 파는 게 대부분이고, 회사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외부 약속이 있는 주간에는 정말 남은 식재료가 난감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식재료를 많이 버리게 되기도 해서 스트레스를 은근히 받았더랬다. 물론 지금도 버리는 식재료가 생기고 있지만 시행착오를 거쳐서 그런지 예전이 비하면 많이 나아지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냉장고 청소도 마냥 좋진 않다. 한 번씩 냉장고 안에 재료들을 다 꺼내서 유통기한 확인하고 버리는 것도 일이고, 쟁여놓는 걸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청소하는 날 발굴하듯이 식재료를 찾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어이없어한다. 


냉장고 속이 카오스의 끝을 달릴 때 친구가 와서 냉장고를 보더니 "혼자 사는 거 맞지?" 하고 물어볼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다짐한다. 귀찮아도 청소해야지 하고.


냉장고는 왜 그렇게 빨리 더러워지는지 청소를 해도 정말 티가 하나도 안 나는데, 그래도 안 하면 또 찜찜하다. 잡다하게 할 일이 많은데 티가 나지 않는 게 집안일이라고 하더니 정말... 가끔 이걸 해야 하나 하고 넘길 때도 있지만 정말 귀찮다.


이런 소소한 귀찮음을 느끼지 않으면 좋긴 좋다. 




처음부터 냉장고 지분 100%의 삶을 즐겼던 건 아니었다. 


엄마의 투병이 시작되고 손을 못 쓰시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뭐든지 내가 하게 되었는데 청소는 쉽게 할 수 있지만 냉장고 속 엄마가 해준 음식들이 사라지는 걸 보는 게 너무 별로였다. 


엄마도 음식을 해주고 싶으니 살아계실 때는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알려주셔서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어서 그나마 좀 마음이 채워지긴 했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투병기간 때문에 냉장고 속 엄마를 추억할 반찬이나 김치 하나 안 남아있는 게 속상해서 한동안 냉장고 자체를 안 열어보기도 했다.  

 

버티고 버티다가 열어본 냉장고 안은 정말 혼란 그 자체. 그때 냉장고 모습이 꼭 내 마음 같았다. 


결국 다 꺼내서 버리고, 엄마가 모아둔 양념이나 장류도 버리고 그렇게 또 하나둘씩 비워지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아서 한동안 먹지도 않는데 무언가를 사서 꽉꽉 채워놓다가 못 먹고 버리기도 했다. 


나는 엄마의 옷을 정리하는 것보다, 주방 살림과 냉장고를 정리하는 게 더 마음이 아파서 정리할 때마다 정말 많이 울었다.


우리 둘이 살 때 엄마가 밤낮으로 일을 해서 얼굴을 보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밥솥에는 항상 따뜻한 밥과 냉장고 속에서 여러 반찬을 매일매일 만들어놓고 내가 혼자서도 잘 먹을 수 있게 했다. 어릴 때야 그냥 그런가 보다 했던 엄마의 정성은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보니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국에 남은 어른이 엄마밖에 없었는데, 이미 다 커버린 나와 사촌들이 명절 분위기를 느끼면 좋겠다고, 서울에 고모가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마음을 전해주고 싶다면서 명절 때마다 1주일 전부터 장을 봐서 우리가 좋아하는 명절 음식을 만들어놓고 불러서 먹이고, 싸주기도 했던 엄마였다.


교회에서 행사가 있으면 지역 식구들 드시기 편하게 샌드위치 재료를 정말 김치통 한통을 만들어놓고는 하나하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나누기도 했고, 반찬을 많이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나눠먹기도 했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엄마가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의 한 방법이어서 주방은 엄마의 사랑이 가득한 장소이기도 했기에 나는 엄마가 투병을 시작하고 나서 점점 비어 가는 냉장고를 보는게 그렇게 마음이 아렸고, 엄마가 가시고 나서는 주방 그 공간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내가 사는 동안 냉장고 속이 비워져있거나 주방에 엄마가 없었던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적응을 해야지만 살 수 있다.


적응을 해야 한다면 주방과 친해져 보기로 했다. 냉장고 청소를 마치고 먼저 한 건 전기밥솥을 버리고 작은 솥을 사서 솥밥을 해 먹기로 했다. 이 귀찮음을 굳이 자처한 이유는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챙기길 바랬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장을 보고,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채워놓고 엄마가 해준 밥이 그리우면 해 먹으면 된다. 물론 엄마가 해준 그 맛이 안 나겠지만 해보는 걸로 의미를 두고 한다. 아직 해산물은 못 만지는 쫄보이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걸 해보고 그렇게 살면서 냉장고 지분율이 100%가 되었다.


엄마가 사 먹지 말고 혼자 있어도 꼭 밥 해먹 어보라고 했던 말이 스스로 잘 돌보라는 엄마의 마음인 거  같아서 즐기며 살아보기로 했다. 


삼십몇년을 엄마와 살다가 독립한 이제 겨우 4년 차 독리버는 별거 아닌 그저 모든 것이 다 즐거울 뿐이다. 냉장고를 내 맘대로 채우는 게 뭐 별 거 아닌 걸 수도 있는데 난 이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만큼 소소하게 재미를 찾아 살기로 했다.


또 냉장고를 채우러 쇼핑 앱을 켜보려고 한다. 

정말 잘해 먹고 잘 살아야지!

작가의 이전글 자유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