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추운 겨울,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고3이었고 수능을 망쳤고 힘없이 논술을 보러 다녔다.
논술 시험까지 모두 치르고 우리 가족은 제주도에 갔다. 할머니는 집에 계셨다. 걸음 속도도 안 맞는데 늙은이가 가서 뭐하냐고.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다녀오라고 손사래를 치셨다. 할머니의 마중과는 달리, 우리는 제주도에서 즐겁지 못했다.
수능을 망친 수험생의 울적함은 그 깊이가 유별났다. 일부러 유별나게 울적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잔잔한 바닷물결 앞에서 나는 너무 초라했다. 고통은 고통의 곁을 고통에 빠뜨린다는 말처럼 같이 여행 온 가족들을 쓸쓸한 기분으로 끌어들였다.
첫날 저녁, 제주 흑돼지를 먹던 아빠가 급체했다. 죽다 살아났다고. 앞으로 남은 여행은 기분 좋게 다니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큰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화장실 가다가 넘어지셨대. 응급실인데 고관절을 다치신 것 같단다. 눈도 침침한 양반이 왜 하필이면 새벽에 불도 안 켜고 화장실을 가셨다냐."
얼마 전 새로 깐 깔개에 미끄러져 뒤로 넘어지신 것이다. 다행히 엉덩이와 손으로 바닥을 짚어 큰 화는 면할 수 있었지만, 당장 수술을 하셔야 했다.
병원에는 큰아버지가 계셨고, 우리가 돌아가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일정을 마치고 가기로 했다. 수술이 끝나야 사람 손이 더 필요할 것이었다.
할머니는 수술을 용감히 마치셨고, 느리게 회복하는 중이었다. 왜 밤중에 불도 안 켜고 화장실에 가셨냐. 왜 그렇게 고집스럽냐. 철없는 손녀는 할머니를 타박했다.
할머니는 민망한 얼굴로 대학 발표는 났느냐고, 할머니가 열심히 기도했으니 반드시 붙을 것이라며 울적함에 빠진 손녀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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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갑자기 폐렴이 생기셨다. 중환자실은 환자 면회가 하루에 두 번 밖에 안된다. 들어갈 때는 위생복과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고, 손 소독은 필수이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이 중환자실 면회 가는 것을 말렸다. 하지만 가야만 했다.
할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산소 호흡기를 쓰고 사지를 헤매는 와중에도 손녀 이름을 듣고 목소리를 들으면 눈을 번쩍번쩍 떴다.
할머니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할머니 저 학교 붙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며 눈물을 삼켰던 순간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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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는 할머니가 키워주셨다. 조리원에 있는 엄마를 보러 가자고 보채던 손녀 옆에는 할머니가 있었고, 네 발 자전거를 타며 행복해하던 손녀 옆에도 할머니가 있었다. 아빠에게 혼나고 슬퍼하던 날, 내 옆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항상 내 편이었다. 항상 내 곁에 있는 사람.
그때까지 할머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소리 내어한 적이 없었다. 상황은 계속 안 좋았다. 점점 안 좋았다. 내가 면회 가는 횟수가 줄어들 때쯤, 엄마는 할머니 귓속에 사랑한다고 말하라 했다.
왜 나는 이 말을 지금 해야 할까. 왜 전에는 이 말을 쉽게 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표현에 서툴렀을까.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눈물이 왈칵했다.
"할머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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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가기 전, 할머니와 아주 길게 대화를 나눴다. 평생 주문 공부를 해 온 것의 의미를 근래야 찾게 되셨다고, 당신의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쓰리고 고맙다고, 당신의 손녀는 착한 사람이고 뭐든 할 것이라고. 평소 할머니 말은 들은 체도 안 하던 손녀는 그날따라 할머니의 이야기가 재밌었다. 할머니의 은단 냄새도 나쁘지 않았다. 죽음과 삶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장례식은 입김이 서리는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눈물을 삼켰다. 사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요즘은 자주 할머니가 생각난다.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른다. 할머니를 안아주고 싶다. 돌봐줘서 고맙다고, 못된 손녀가 많이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