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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전자 Aug 16. 2023

불안을 마주하는 법

손톱 물어뜯는 습관 고치기

  나에게 불안은 큰 화두였다. 당신이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내 손톱을 보며 어딘가 불안감이 꽉 찬 사람이라는 걸 짐작할 수도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어진 이 습관은 어릴 적부터 불안을 잘 대하지 못하고 흘려보낸 시간의 흔적일 수도 있겠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변명이다.) 사람이 불안할 때 하는 행동으로 손톱 물어뜯는 걸 떠올리지 않는가. 물론 고치지 못한 나쁜 습관을 대변하려는 걸 수도 있겠지만. (맞다. 그냥 행동력 부족한 사람이 나쁜 습관에 대해 변명하려는 말이다.)


  나는 불안할 때마다 만만한 손톱을 못살게 굴었고 온전히 행복할 수 있을 때에도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불안을 상기하곤 했다. 너무 행복한 건 위험해. 행복은 언제든 삶에게 빼앗길 수 있으니 긴장해야 해.


  그렇지만 일상에서 언제나 불안에 휘둘려 어찌할 줄 몰라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수준의 불안이었고,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글로 풀어내며 불안을 잠재웠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술로 잊으려 하기도 하고 했다. 어느 정도 불안을 숨기고 감추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내가 불안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불안은 일상을 살아내는 힘을 덮쳤다. 대학생인 내가 느낀 불안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진로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기면 불안이 사라질 줄 알았다. (음 근데 ‘확신’이라는 것도 애매하다...) 나는 스스로 물리적, 정신적으로 최대한 굴리기로 했다. 불안한 마음도 잊고 진로 탐색을 위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극단으로 치솟은 불안에 밀려 엉겁결에 내린 결정과 행동이었다.


  그렇게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우선 버거운 직장이었다. 인턴에 불과했지만 사원과 동일한 업무 내용과 동일한 양의 일이 주어졌다. 직무 특성상 하루 단위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았고 와중에 클라이언트사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아쌉으로 일처리를 하는 게 중요했다. 위계서열을 넘어선 군대문화 비슷한 생태계, 동기도 없는 직장생활, 그나마 가까운 동료라면 서너 살 터울의 남자 사원들 (나는 여자이고 동성이 더 편하다. 성으로 구분 지으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냥 내가 그렇게 길러졌다.), 게다가 사원들과 동일한 업무 강도에 최저임금을 받았으니 처음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던 것 같다. 심지어 (불안이 쏘아 올린 열정이었는지 약간 멍청했던 나는) 학교 수업을 세 개나 들으면서 학외 활동으로 친구들과 만든 동아리를 했다.


  주말에도 쉴 틈 없이 바쁜 생활이었다. 불안의 원천이라고 생각한 진로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꽉 찬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불안을 느낄 새가 있을까?


  해야 할 일이 많으니 하나에 집중하지 못해서 불안하고, 스스로 설정한 높은 잣대를 넘지 못해서 불안하고, 상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실망시키지 않을까 불안했다. 실제 행동이나 결과와 무관하게 무엇이든 더 잘 해내지 못해 상사, 동료, 동아리 친구들에게 언제나 미안한 마음투성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죄책감을 넘어서 스스로 가짜 인간처럼 느껴졌고, 들통날까 봐 불안했다. ‘을’의 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심지어 나에게조차 나는 을이었다. 나의 역사상 가장 불안한 시기였다. (감량을 모르고 너무 나댄 죄이다!)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물리적인 시간도 부족해서 집에서 혼자 충전할 시간도 모자랐다. 겨우 만난 친구들에게는 힘들다는 얘기를 토해내기 바빴다. 그렇다고 힘듦이 사라지거나 예전처럼 불안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얘기할수록 더 불안은 커지고 친구들의 작은 불안도 나에게 너무 크게 느껴졌다. 친구들을 밀어냈다. 나는 벼랑 끝에서 떨어졌다.


  불안이라는 골짜기에 빠진 나는 삶의 의미를 묻기 시작했다. (오 큰일이다.) 금기된 질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다. 판도라처럼 재빨리 상자를 닫지 못해 나의 상자에서는 희망까지 빠져나갔다. 나는 텅 빈 상태가 되어버렸다. 의지도 희망도 없었다. 그대로 불안의 파도에 둥둥 휩쓸려 다녔다. 오히려 손톱은 예쁘게 길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매일 너무나 무서웠지만 동시에 무서운 게 없었다. 무작정 책을 찾아 읽고 (도망가다시피) 여행을 가고 그림을 그리고 (힘들었던 순간을 지워내듯) 청소를 하고 (살아보려고) 운동을 하고 요리를 하고 꽃을 샀다. (가족 몰래) 상담을 받고 가까운 친구들을 만나고 글을 썼다. 그리고 불안을 마주했다.


  불안은 생각보다 무서운 얼굴이 아니었다. 나를 괴롭히던 그 존재는 주인 없이 달려가는 마차였다. 조종석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아 그곳에 누구를 앉히라고 말하는 마차였다. 그러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몰라 징징대고 있었다. 놀랍고 허탈했다. 불안은 여태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세간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이 말을 느끼기까지 참 많은 경험과 시간이 나에게 필요했던 것 같다.


  나의 짧은 손톱. 이건 내가 살아있다는 징표이다. 살아서 불안이라는 마차를 조종하는 손이라는 징표이다. 이 습관을 고치기 귀찮은 사람의 발악이 아니다. 더이상 손톱을 물어뜯을 일이 없다면 불안하지 않다는 것이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조금 더 솔직해지면 고칠 생각도 없고 마음속 깊이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손가락 모델도 아니고 내가 왜 고쳐야 하는데? 메롱.)


  오늘은 안정감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 국가, 학교, 회사와 같은 체계로부터 안정감을 기대했다. 한때는 돈에게서 그걸 기대했다. (음음 자본사회에서 돈은 확실한 안정감이다.) 하지만 어떠한 시스템이나 체제, 구조가 충족시키진 못했다. 삶의 안정감은 사람들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나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사람들의 온기로부터. 사실 예전의 나도 알고 있었다. 너무 익숙해서 인지하지 못했을 뿐.


  그래서 이 글은 내 안의 온기를 이끌어 내준, 각자의 온기를 나눠준 사람들에게 보내는 고마움이기도 하다. 손톱을 물어뜯지 않아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 사람들. 너무나 늘어지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당신들에게 고맙다.



  추신. 만약 다시 불안의 계곡에 빠진다면, 오늘 하루만 살아도 된다. 희망이 없어도 된다. 그냥 살아있기만 하면 된다. 멀리 볼수록, 아득해지는 상상과 현재와의 괴리 때문에 비교하고 자책하게 된다. 하지만 방향이 있으니, 그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오늘을 마음껏 즐기면 된다. 나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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