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워킹맘, 그 무거운 이름

맘고리즘 속 카오스

by 욤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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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여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자신의 아이 셋을 두고 눈을 감았다. 과로사란다. 아이를 위해 삶의 전장에 뛰쳐나왔는데 꽃도 펴보지 못하고, 첫 번째 월급을 받아보도 못하고 홀연히 떠났다. 복직 일주일만의 일이다.


공무원 신분이니 육아휴직을 연짱 3번 연달아 붙여썼는지(공백이 긴 1번), 막내가 터울이 좀 있는 걸 보니 2번에 나눠썼는지, 3번에 나눠썼는지 알길이 없지만, 복직 후 얼마나 초초했을까.


경험해 본 사람만 안다. 나 역시 만 3년 사이에 전체 기간으로는 만 15개월(만6개월, 만9개월 총 2회) 동안 휴직 상태였다. 우리회사는 적어도 ‘복직이 안되면 어쩌지?’와 같은 생각이나 ‘육휴를 2번이나 써서 짤리면 어쩌지?’와 같은 공포심을 주진 않는다.


다만 우리회사에서 이렇게 단 기간에 육휴(출산휴가포함)를 15개월이나 쓴 사람은 내가 처음이란 사실을 깨달았을때 남몰래 벌벌 떨었던 기억이...


2) 아이를 낳아보지 않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또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키운지 오래된 선배들은 오히려 쉽게 말한다.


“세상 좋아졌다.”

“같은 팀에서 육휴를 두 번이나 쓰는 사람은 양심이 있는 거냐?”

“우리 땐 37(삼칠)일만에 툭툭털고 나와서 일했어!”


흠, 틀린 말은 아니다. 감사했다.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음에, 길다면 긴 저 시간 동안 나를 기다려주심에. 아침에 눈 떠 갈 곳이 여전히 있음에 또 감사했다. 그중에서 내 아이를 짧게 나마 내 손으로 반년정도 보살피고 나올 수 있는 현실에 감사했다.


하지만 육휴는 (그것도 최소한의 육휴) 경제적 차원 이상의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 양심? 하고는 절대 거리가 멀다. 그럼 이미 생긴 아이를 나와 피도 안섞인 동료들을 위해 양심? 문제로 포기하란 말인가? 저 말을 뱉은 선배를 향해 난 (너도 애 낳아봐)라고 일갈! 하고싶었다(현실은 걍 찌그리).


3) 복직 후 기다렸다는 듯이 위기가 찾아왔다. 최 첫째씨 뇌수막염 진단. 아이가 바로 입원해야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월요일에 복직했는데, 화요일 아침 11시 30분에 회의실에서 뛰쳐나와 받은 전화다. 인수인계를 받고 있었다.


복직 후 팀과 업무가 바뀐 상황, 팀장님께 말할 엄두가 안났다. 일단 입을 다물고 눈물을 삼켰다. 당연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앉았다. 회의며 점심이며 대충 시간을 떼웠다. 당장 내 몸 하나 적응하기도 힘든 마당에(눈치보기도 힘든 마당에) 심지어 아이의 생애 첫 입원을 맞이하다니!


어머님께 계속 전화가 왔다. 얼른 와야할 것 같다고. 첫째가 맥을 못추고 울며 엄마만 찾는다고.

하나만 맡기고 나올 땐 어머님이 이런 경우엔 할마가 돼 주셨다. 하지만 돌도 안된 둘째도 같이 놓고 나온 상황. 게다가 뇌수막염은 전염성이 짙은 수족구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이었고, 최 둘째씨가 감염된다면 진짜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개미 목소리로 팀장님께 양해를 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튿 날이라 당장 오늘내일 처리할 맡은 업무는 많지 않았지만 론칭을 한 달도 안 남겨놓은 프로젝트의 메인마스터 역할을 하기로 했었다. 앞이 깜깜했고, 절망스러웠다.


애는 기다렸다는 듯 40도, 41도에 고통스런 두통을 호소했고 최진상씨가 되었다. 엄마도 감당이 안되는 상황에 할마는 무리였다. 조용히 3일 휴가를 냈다. 월요일 복직 후, 화요일 조퇴, 수목금 휴가다! 내가 팀장이어도 난감한 상황. 하지만 어쩌겠는가. 얼굴이 화끈 거렸지만 애비는 전혀 휴가를 쓸 수 없다. 게다가 어머님은 둘째를 격리 수용해 주셔야 했다.


3박 4일 아이의 생애 첫 입원을 무사히 마치고 바쁜 남편을 대신해 친정부모님 찬스를 써 퇴원하기로 했다. 퇴원하기로 한 날 새벽, 5일만에 다시 만난 둘째가 고열이다. 병실에 아빠와 첫째를 두고, 난 둘째와 응급실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수족구였다.


진짜 4일을 눈물을 삼키며 버텼다. 아이를 병실 침대에 재우고 새벽 3시, 4시까지 업무 백업을 했다. 와이파이가 원활하지 않아 휴대전화 테더링을 의지해 꾸역꾸역 집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를 했다. (결과적으론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일말의 양심같은 거였다.


둘째의 수족구 진단이 나를 무너뜨렸다. 응급실 바닥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다. 남편에게 조차 상황을 알리기 어려웠다. 첫째 친구 엄마에게 전활 걸어 말없이 울기만 했다. ‘언니 나 어떻게해요. 진짜 너무 힘들어요.’ 그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주는 작은 위로가 있다. 아니 그 어떤 위로보다 정말 크다. 그렇게 다시 꼬박 주말을 병원에서 보냈다.


4) 다시 회상해 보아도 작년 여름은 길디 길었다, 너무 더운 탓에 두 아이를 보는 어머님도 지쳐갔다. 우리 어머님 세상에서 에너지 넘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우신 분인데, 어머님이 힘드시다는 건 진짜 힘드시단 소리다. 젊은 나도 힘든데, 오죽 할까.


그 여름은 둘째의 급성장염을 동반한 장폐색증 진단으로 입원을 한 번 더 하고서야 끝이 났다. 연차가 거의 다 소진돼 갔다.


5) 나 역시 새로운 업무와 새로운 롤을 받은 터라 긴장한 상태였다. 맡았던 프로젝트는 성과가 좋지 않았고 ‘실패한 프로젝트’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나는 하루하루 출근해 일과시간 넘치도록 일을 하고 있는데 밖에 보이는 성과는 없고, 사람들은 “그래서 넌 하는 일이 뭐라고?” “6개월동안 무슨 일을 했다고?” 하며 쉽게 말했다.


종종 먼지처럼 사라져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나 이러다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지나? 다른 공포가 찾아왔다.


6) 눈을 감은 그 공무원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복직 후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감, 존재감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책임감, 그동안 내가 쉴 때 내 몫까지 일한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미안함. 복잡한 감동이었을 거다. 그래 적어도 아이들 가슴에 못박고 나왔으니 돈도 잘 벌고, 일도 잘 해내서 두 마리 토끼, 세 마리 토끼 다 잡아보자, 하는 마음이었겠지.


7) 그래서 이를 악물고 휴직때 책을 썼다. 둘째아이가 백일이 막 넘었을 무렵이다. 우리회사에서 처음 9개월을 쉬는(길지도 짧지도 않은) 케이스였기에, 기자로서 글감이 떨어지거나 글빨, 감각, 센스, 발제 능력 등이 쇠퇴할까 두려웠다.


이 악물고 감을 놓지 않으려 했고 결국 두세 달 새벽을 맞이하며 다행히 해냈다.


사실 책을 쓰며 얻은 게 많다.

이전에 기사를 쓰면, 내 글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누가 기사 잘 못 쓴다고 욕하면 어쩌지? 이게 맞는 건가?


어쨌든 저쨌든 책을 혼자 두 권이나 매듭짓고 나니, 문장력이라기 보다는 내가 쓰는 글의 원칙이 생겼다. 예를 들어 (접속사는 최대한 쓰지 말자, 문장은 최대한 짧게, 주술호응 반드시 체크, 띄어쓰기의 세계, 그/그녀는 구분하지 말 것 등) 이다.


이론적으론 수습기자 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원칙이나 실제로 적용이 잘 안됐었는데, 책을 쓰고나니 글을 쓸때 내 문장을 스스로 체크하는 알고리듬이 머릿 속에 생성됐다. 아무리 누가 가르쳐줘도 안 되던 일이었는데, 인이 베긴 것 처럼 훈장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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