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단편소설] 4화
어느새 너는 남자와 일정 보폭을 유지한 채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있다. 서서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성형외과 광고, 아이돌 스타의 생일 축하 광고, 편의점 간판, 신발 가게……. 여기가 어디인지, 출구는 어느 쪽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전에 와 본 적 없는 낯선 역이다. 남자가 어디까지 갈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복통은 멈추었지만 다리가 점점 아파 온다. 더는 남자의 보폭을 맞추기가 어렵다. 너는 지금 당장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다. 노트북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남자를 끝까지 따라가거나.
너는 마침내 노트북을 포기하기로 한다. 노트북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간다고 해도 혹여나 누군가가 주워 네 정보를 찾아 연락을 줄 수도 있으니까. 왼손의 힘을 천천히 푼 너는 천천히 노트북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이제 두 팔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너는 곧바로 왼쪽 손을 바지 왼쪽 뒷주머니에 넣는다. 그런데 그때, 남자가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밖으로 나간다. 너는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지 못한 채 남자와 한 몸이 된 듯 포개져 개찰구를 통과한다. 툭 튀어나온 백팩에 네 몸이 닿았지만 남자는 너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다. 남자는 스마트폰 영상에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남자는 출구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바삐 오르는 사이, 갑자기 너의 오른쪽 운동화 끈이 풀려 버린다. 그러다 헐거워진 운동화 한 짝이 벗겨진다. 운동화는 계단 아래로,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그러나 너는 무작정 남자를 따라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다. 남자의 걸음이 너무나 빨라, 뒷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낼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계단 밖으로 나가자, 3번 출구 표시가 보인다. 남자는 횡단보도 앞에 서기 위해 발걸음 속도를 늦춘다. 드디어 남자가 멈추려 한다.
“이봐요, 이제 그만 멈춰요!”
그러나 그때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면서 남자는 걸음을 멈출 필요가 없어진다. 너는 한쪽 신발을 잃어버린 채 절뚝이며 걷는다. 그제야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너를 쳐다본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려 다가오지는 않는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전자시계를 확인한다. 오전 8시 45분. 남자 머리 위로 커다란 고층빌딩이 보인다. 남자는 그 건물을 향해 걸어간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남자가 건물 중앙에 있는 회전문을 밀며 들어간다. 너는 간신히 등 뒤를 바짝 쫓아 회전문을 통과한다. 남자는 일 층 로비를 지나 왼쪽에 있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쩌다 보니 너는 남자의 회사 안까지 들어와 버렸다.
사무실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남자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내고 스마트폰과 함께 책상 위에 둔다. 자리에 앉기 전에 양어깨에 걸친 가방끈을 푼다. 남자의 몸이 천천히 움직인다. 남자는 드디어 뒤를 돌아본다.
“아악! 누,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