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단편소설] 3화
이어폰 줄이 남자의 백팩에 걸리던 찰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장면이 있었다. 너는 눈을 감고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곧 그 장면이 펼쳐지던 때로 빨려 들어갔다.
공연을 끝낸 네가 무대 위에서 커튼콜을 하던 때. 함께 출연한 배우들과 손잡고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찰나, 갑자기 목뼈부터 꼬리뼈까지 통증이 한차례 지나갔다. 너는 고개 숙여 인사하다 말고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동료들은 바닥에 쓰러진 너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무대 위 커튼이 급하게 쳐졌다. 너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고, 그날 이후로 한동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 장면이 전구가 깜박이듯 너의 머릿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이어폰 줄이 정체 모를 누군가의 가방에 묶여 무작정 끌려다니는 이 상황이, 침대에 누워만 있던 시절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너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앞사람을 멈추게 해 주세요!”
“…….”
“남자가 뒤돌아보게 해 주세요!”
“…….”
“이 줄을 끊어 주세요!”
“…….”
너는 목청을 높이며 외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계속 가던 길을 갔다. 출근길 지하철역에는 너나없이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뿐. 일 분 일 초의 시간과 다투는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사정을 궁금해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너는 누군가가 너를 부르며 따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황문 배우님 맞으시죠? 로미오와 줄리엣 정말 잘 봤어요. 엄청 팬이었는데.”
너는 앞의 남자를 정신없이 따라가느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앞의 남자를 멈추게 해 주세요.”
“앞에 누구요?”
“제 이어폰 줄이 걸린 저 백팩 주인 말이에요.”
너를 알아본 사람은 대화의 흥미를 잃었는지 가던 길을 마저 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왜 남자를 못 본 걸까. 이상했다. 잠시 후 너는 어느새 남자의 걸음걸이 속도를 정확히 맞춰 따라가고 있는 네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앞의 남자에게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앞의 남자와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그저 뒤에서 걸어가는 행인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몇 분이 흘렀을까? 여기는 어느 역이길래 출구까지 거리가 이렇게 먼 걸까? 정신없이 남자에게 끌려 나오다 보니 너는 내릴 때 역 이름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너는 목이 마르고 다리가 아프다. 갑자기 배도 아프기 시작한다. 어젯밤, 디자인 초안 작업을 마치고 맥주 한 캔을 마신 게 화근이었다. 이번 마감이 끝나면 너는 과연 또 일을 구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몸이 회복된 후 어렵게 찾은 직업이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웹디자인 강의를 알게 돼 수강했다. 그리고 자격증을 딴 뒤 운 좋게 취업할 수 있었다. 다행히 손가락 관절 통증이 점점 나아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곧 회사를 그만두었고, 외주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실력이 금세 늘지는 않았다. 디자인 결과물은 서툴렀고,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다시 무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연기를 다시 할 수 있을지 망설여졌다. ‘진실의 적’은 이미 적이 아니라 아군이 되어 있는 듯했다. 삼 년 사이에 아주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이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남자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남자는 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걸까?’
너는 네가 예전에 연기했던 연극 『소돔과 고모라』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천사의 명령을 어기고 뒤돌아보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 이야기. 지금 누군가가 저 남자를 이용해 너의 연기를 시험하는 건 아닌지,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는지를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 곧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는 걸 깨닫고는 피식 웃음을 내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