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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유경 Nov 12. 2022

불확실한 매듭 (2)

[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단편소설] 2화

  오늘 너의 이어폰 줄이 걸린 곳은, 지하철 열차 문 앞에 서서 성경책을 읽고 있는 남자의 팔이었다. 위에서 세게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을 피하려고 옆 칸으로 이동하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너의 이어폰 줄이 남자의 윗옷 소매에 붙은 단추에 걸렸다. 네 걸음은 갑자기 멈춰졌다. 귓속에 꽂혀 있던 이어폰이 스르르 빠져나와 허공에서 흔들렸다. 네가 그 사실을 모른 채 한 발짝 움직이자 이어폰 줄이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고, 남자는 그만 읽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이, 씨발.”

  남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탄식과 함께 너의 머릿속에는 불현듯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깊은 밤, 하얗게 눈 쌓인 4차선 도로를 걸으며 배를 부여잡고 깔깔대며 웃고 있는 너의 모습. 그날은 네가 데뷔한 무대의 마지막 공연 날이었다. 매 회 전석 매진에 커튼콜마다 관객들이 모두 기립 박수를 쳐 주었다. 성공적인 무대였다. 공연이 끝난 후 너는 동료 배우들과 함께 새해 타종 소리를 들으며 거리를 누볐다.

  그 장면이 머릿속을 스친 후, 너는 갑자기 배 근육이 땅기는 걸 느꼈다. 실제로 크게 웃은 것처럼. 정신을 차린 너는 남자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네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우려 손을 뻗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기묘한 소리로 낄낄대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너는 바닥에 떨어진 성경책을 집어 남자의 손에 쥐어 준 뒤 서둘러 옆 칸으로 건너갔다.

  옆 칸은 에어컨 바람이 비교적 약했다. 너는 빠진 이어폰을 귓속에 다시 꽂고 음악을 마저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음악 소리가 멈춰 있었다. 이어폰이 고장 난 걸까. 너는 스마트폰을 꺼내 멈춤 버튼을 눌렀다가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음악이 아까 멈췄던 부분에서 다시 재생됐다.

  칼국수 이어폰 줄이 ‘절대 꼬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주머니에 넣거나, 가방에 넣어 두면 어김없이 서로 꼬이고 엉켜 있었다. 이어폰을 귓속에 꽂기 전에는 반드시 꼬여 있는 줄을 풀어야 했다. 줄을 다 풀고 나면 지하철역 한 정거장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어폰을 즉흥적으로 사긴 했지만 너는 꼬인 줄을 푸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기대를 조금은 했었다. 그러나 어느 이어폰이든 마찬가지라는 걸, 너는 깨달았다. 줄을 풀 때마다 속은 기분이 들었다. 너는 당장 무선 이어폰을 구입하겠다고 결심했다.

  배 근육이 땅기는 느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책 읽는 남자의 기묘한 웃음소리가 따라와 이어폰에서 들리는 듯했다. 네 몸은 마치 네가 그 남자와 함께 낄낄 웃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 얼굴에서 약간의 열기가 느껴졌다. 이어폰 스피커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는 고개를 잠시 젓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유리창 밖이 어두웠다.

  너는 평일 아침마다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네가 작업할 동네와 카페는 매번 바뀌었고, 이동하는 시간에는 늘 이어폰을 양쪽 귓속에 꼈다. 좋아하는 곡 하나를 반복해 들으면서 시간의 흐름을 가늠했다.

  손으로 배를 주무르면서 너는 문앞으로 갔다. 손잡이 기둥에 몸을 기대고 같은 곡을 다섯 번째 반복해 들었다. 열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졸거나 스마트폰에 시선을 두었다. 표정은 한결같이 무심했고, 마른 식물처럼 건조했다.

  사람들 얼굴 사이로 옆 칸을 흘깃 쳐다보았다.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책 읽던 남자는 이미 내리고 없는 듯했다.

  목적지로 가려면 한 시간은 더 가야 했다. 원래는 미아역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득 혜화역으로 가고 싶어졌다. 혜화역은 몇 년 전까지 네가 매일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동안 그곳에 가기를 애써 외면했는데, 오늘은 왠지 그곳에 가야만 할 것만 같았다. 아까 남자에게 이어폰이 걸렸을 때 떠올랐던 장면이 잔상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너는 갑자기 그곳의 공기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누군가 너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곧 정신을 차린 너는 이어폰 줄이 다른 누군가의 백팩에 걸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 가방의 울퉁불퉁한 쇠 장식에 이어폰 줄이 휙 감겨 있었다. 너의 몸은 저절로 움직였고, 열린 열차 문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역에 내려 버린 것이다. 너는 걸음을 멈추고 싶었지만, 두 다리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어폰 줄과 몸을 분리하면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어폰 줄이 연결된 스마트폰이 바지 왼쪽 뒷주머니에 있었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왼손으로 노트북을 들고 있었고, 오른손밖에 쓰지 못했다. 오른손을 바지 왼쪽 뒷주머니로 뻗었지만 허겁지겁 걸으면서 움직이다 보니 손이 닿지 않았다.

  “저기요, 저기 좀 멈춰요!”

  너는 백팩을 멘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너보다 덩치가 큰 남자였다. 남자의 몸이 앞을 가려 시야가 좁아졌다. 주변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남자는 너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자세히 보니, 남자도 양쪽 귓속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굽힌 채 오른쪽 팔로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는 게 틀림없었다.

  너는 백팩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너의 손끝은 백팩까지 닿지 않았다. 생각보다 백팩과 너와의 사이는 매우 멀었다. 남자는 자신의 등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앞사람을 따라가야만 하는 너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마치 목줄에 매여 주인에게 끌려가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주인 얼굴도 모른 채 무작정 끌려가는 개. 가느다란 이어폰 줄로 이어진 남자와 네 사이는 좁혀졌다가도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남자의 발걸음은 제법 빨랐다. 출근 시간이 임박했는지 멈추지 않고 서둘러 걸었다. 남자의 뒤통수만 보면서 걷는 사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던 이어폰 줄이 서로 감기며 꼬였다.

  출렁, 출, 렁출, 렁, 출렁.

  눈앞에서 꼬이고 꼬이는 줄을 너는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걸음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너는 이어폰 줄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하지만 네가 줄을 잡아당길수록 이어폰 줄은 풀리기는커녕 더 복잡하게 꼬였다. 남자는 자신의 가방이 잡아당겨지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고, 똑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너는 들고 있는 노트북을 손에서 놓아 버리고 싶었다.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쉽사리 노트북을 떨구지 못했다. 그동안 해 왔던 디자인 작업 데이터와 포트폴리오가 저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가 디자인 일을 시작하기 전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던 영상이 노트북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진작 클라우드에 저장해 놨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걸까. 너는 당장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이어폰 줄을 끊어 버릴까. 그러려면 가위나 칼이 필요했다. 당장 맨손으로 끊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칼국수 이어폰의 장점은 꼬이지 않는 게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것인가?’

  너는 이어폰을 팔던 젊은 남자가 원망스러워졌다.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너는 인기 많은 뮤지컬 배우였다. 네가 주연으로 캐스팅된 공연은 티켓 오픈일마다 예매 전쟁으로 일 초 만에 매진됐다.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해 십 년 넘게 내공을 쌓은 너는 아이돌 출신 배우 못지않게 팬 층이 두터웠다. 미남은 아니었지만, 관객들은 너의 연기에 진정성이 있다고 평했다. 어느 역할을 맡든지 공연의 중심을 잡아 준다며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았다. 너는 무대가 암전되면 바로 맡은 역할에 몰입하며 연기에 빠져들었다.

  “현실은 진실의 적이다!”

  너는 네가 했던 수많은 대사 중 이 대사를 가장 좋아했다. 무대는 너에게 곧 현실이었지만, 연기하는 시간은 ‘진실의 적’을 막아 주는 방패와도 같았다. 죽기 전까지 무대에 오르는 것이 너의 꿈이었다.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주연을 맡지 못하더라도 무대에만 오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했다. 언제나 즐거웠고, 뮤지컬 배우로서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네 몸에 원인 모를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관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물건도 제대로 집지 못했다. 통증을 느끼면서부터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웠다. 얼굴에 힘을 주지 못했다. 연기 도중 작은 소품을 들어야 할 때도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마음대로 춤을 추지도 못했다. 당연히 연기도 할 수 없었다.

대학병원의 거의 모든 과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통증의 정확한 원인은 밝히지 못했다. 신경성이라고만 했다. 너는 스테로이드와 항생제를 정기적으로 투약했지만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 통증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너는 까마득한 현실 속으로 깊이, 깊이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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