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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유경 Nov 12. 2022

불확실한 매듭 (1)

[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단편소설] 1화

  너는 문득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짐을 느낀다. 지하철역에서 다른 사람의 가방에 이어폰 줄이 걸렸던 찰나였다. 머릿속에 떠올랐던 장면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장면은 아니었다. 사진 여러 장이 중첩된 듯 희미했다. 너는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진 장면을 기억해 내려 애쓴다. 머릿속은 어둡기만 할 뿐 아무런 형체도, 모양도 잡히지 않는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혹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걷다 보면 네 몸은 갑자기 멈추곤 했다. 양쪽 귓속에 끼고 다니는 이어폰 줄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백팩, 옷의 툭 튀어나온 장식에 감기고 얽혔던 것이다. 너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날따라 백팩을 메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혹은 그날따라 이어폰 줄이 유난히 길게 늘어져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런 일들이 자꾸만 반복됐다. 너는 문득 불안감이 밀려와 만나는 사람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시큰둥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다들 한 번씩은 있지 않나? 그게 뭐가 이상해?”

  사람들의 대답을 듣고 너는 ‘최근 신경이 예민해졌나 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너의 이어폰 줄이 행인들의 장신구에 유독 더 자주 걸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길을 걸을 때 단 한 번도 그냥 지나쳐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하루에 다섯 번 넘게 걸린 적도 있다. 이런 탓에 무선 이어폰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귀에 염증이 생긴 이후부터는 줄 이어폰 쓰는 것을 고수했다. 또 이어폰 줄이 타인에게 잘 엮이는 이유를 집요하게 알고 싶은 마음도 컸다.

  너는 골똘히 생각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신기한 점은 이어폰 줄이 무언가에 감겨 걸릴 때마다 부지불식간에 걸음을 멈추게 되고, 그때마다 느닷없이 예전 일들이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마치 무의식 속에서 재생되던 영상에 누군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문득 떠오른 장면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네가 아주 많이 웃었던, 빛을 잡아먹을 만큼 웃음이 나와 헐떡이던 시절이나 혹은 아주 많이 울었던, 어둠을 삼켜 버릴 만큼 눈물이 왈칵 쏟아지던 시절의 네 모습이었다.

  이어폰 줄이 행인에게 걸리는 횟수가 잦아지기 전에도 너는 그와 비슷한 일을 반복해 겪었다. 예를 들면 신발 끈이 자주 풀리거나 구두 밑창이 떨어졌던 일. 중요한 면접이 있던 날, 너는 집을 나선 뒤 몇 구두끈이 풀리는 바람에 앞으로 걷지 못하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끈을 묶어도 계속 풀렸던 그날 결국 예정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야 면접 장소에 도착했고, 너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눈앞에서 바라보거나,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을 보고도 섣불리 발을 떼지 못하는 날들이 지속됐다. 시간이 너의 몸을 자꾸만 붙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발 밑창에 껌이 붙은 것처럼, 너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절뚝, 절뚝거렸다.     

  네가 문제의 이어폰을 산 건 출근길 지하철역 앞에서였다. 프리랜서 웹디자이너인 너는 작업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규칙적인 생활을 추구했다. 일부러 집에서 먼 동네의 카페를 찾아 노트북을 들고 움직였다. 매일 아침 여덟 시에 집을 나와 출근하고, 저녁 여섯 시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출근할 때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집을 나선 뒤 횡단보도를 건너 쇼핑몰을 지나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선은 매일 똑같았다. 그리고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전, 매일 누군가를 보고 지나쳤다. 1번 출구 앞에서 작은 테이블을 세워 두고 ‘칼국수 이어폰’을 파는 노인. 테이블 앞에 써 붙인 ‘절대 꼬이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왜 이름이 ‘칼국수’ 이어폰인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선 이어폰을 사용하는 이때 줄 이어폰을 판매하는 노인이 의아해 보였으나 드문드문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이어폰을 파는 노인은 어느새 하루라도 나오지 않으면 안부가 궁금해지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살짝 고갯짓하며 인사를 나누었고, 노인이 잠깐 자리를 비울 때면 너는 주변을 살피며 노인을 찾았다. 그렇다고 노인에게서 이어폰을 사지는 않았다. 쓰던 것이 고장 나지 않아 굳이 살 필요가 없기도 했고, 서둘러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는 직장인들의 행렬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저 노인을 바라보며 지나치기만 할 뿐, 어떤 교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 대신 젊은 남자가 나와 있었다. 노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너는 묻고 싶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재빠른 걸음걸이로 고개를 숙이고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갔다. 그날 너는 처음으로 에스컬레이터로 곧장 가지 않고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앞에 멈춰 서서 젊은 남자에게 노인의 안부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젊은 남자는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 이어폰을 파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너는 손으로 이어폰 하나를 집은 뒤 젊은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이거 얼마예요?”

  “여기 쓰여 있잖아요.”

  젊은 남자는 귀찮다는 듯 가격이 쓰여 있는 팻말을 가리켰다. 너는 지갑을 꺼내 바로 계산했다. 이어폰을 산 건,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젊은 남자는 현금을 받더니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끝내 너는 젊은 남자에게 노인의 안부를 묻지 못했다.

  그날 이후부터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젊은 남자도 그날 외에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노인이 이어폰을 파는 장소를 옮긴 것인지 아니면 잠시 일을 쉬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궁금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노인의 존재는 금세 잊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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