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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유경 Nov 12. 2022

어떤 대리 (4)

[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단편소설] 4화

 버스 옆자리에 앉은 윤대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내게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이 얘기, 아내 얘기, 전 직장 얘기. 나는 피곤한 얼굴로 대충 호응해 주면서 창밖을 힐끔거렸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는 왜 본명을 안 쓰고 직급으로 부르는 걸까? 사장 철학은 알겠는데 딱히 효과적인지는 모르겠어.

  그런가. 나는 직급으로 부르는 게 오히려 더 편하던데. 닉네임 같기도 하고.

  닉네임은 개성이 드러나는데 직급은 개성이 오히려 묻히잖아.

  그래도 그 문화가 유지되는 걸 보면 나름대로 장점이 있겠지.

  아무튼 여러모로 신기한 회사야. 어, 마대리 다 왔다. 나 이만 내릴게. 내일 봐!

  으, 으응. 잘 가.

  결국 나는 윤대리에게 합정으로 이사했다고 말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뉘었다. 만약 윤대리가 내 이사 소식을 듣고 나면 그때는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복잡한 마음으로 일찍 잠든 나는 그동안 해 왔던 거짓말이 들통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회사 사람들이 우연히 내 본명과 거주지를 알게 되었고, 내 정체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당신 누구냐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느냐고.

  나는 나를 증명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등본, 핸드폰 요금제 가입 명세서, 여권, 집 계약서까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무용지물이었다. 꿈속 회사 사람들은 어떤 서류를 봐도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때 마침 사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내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마대리 아닌가? 자네의 이름이 뭔지, 자네가 어디에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네. 회사에서는 일만 잘하면 되지. 자네가 누군지는 무슨 상관인가. 안 그런가, 다들?

  사장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방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선 덕에 무사히 지각하지 않고 출근할 수 있었다. 산뜻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기쁨도 잠시, 언짢은 일이 나를 반겼다.

  회사에 소문이 퍼져 있었다. 내가 다음 주에 대만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언론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인 SNS 게시물 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티켓을 양도받아 무료로 다녀올 예정이라고. 나는 이 사실을 오전에 화장실에서 알게 됐다. 나를 마주친 편집부 권사원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걸었다.

  마대리 언니, 다음 주 대만 다녀오신다면서요. 그것도 공짜로요. 승진하더니, 좋은 일 연달아 일어나네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에이, 어제 박과장님한테 다 들었어요.

  아, 그거…….

  그런데 동영상 잘 찍으실 수 있겠어요? 마대리 언니가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한다니, 잘 안 그려져서요.

  유튜브라니?

  모르셨어요? 그 여행 조건이 영상 찍어서 업로드하는 거라던데. 유튜브로.

  처음 접한 정보에 당황한 나는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곧바로 박과장님에게 메신저로 물었다.

  팀장님, 화장실에서 황당한 얘길 들었는데요. 제가 다음 주에 대만으로 여행 간다고…….

  박과장님은 바로 답변을 보내왔다.

  응, 내가 소문냈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대리가 좋은 기회 놓칠 것 같아서. 소문나면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지 않겠어? 나중에 분명 나한테 고마워할걸. 부끄러워서 그러나 본데, 한순간이야. 다녀오면 회사에 도움도 될 테고.

  회사에 도움이요?

  그래. 그 비행기 티켓 양도 프로젝트가 꽤 유명해졌어. 최근 언론에 자주 노출되더라고.

  박과장님이 메신저로 인터넷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클릭하자 ‘마주봄 씨를 찾습니다.’ 프로젝트의 미담에 대한 여러 신문 기사들이 떴다. 기사를 클릭하려던 찰나 내 자리 전화가 울렸다.

  네, 마대리입니다.

  마대리 씨, 방으로 들어와요.

  사장님이었다. 어젯밤 꿈에서 나온 사장님의 인자한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사장님이 어떤 일로 나를 부르는 건지 급히 떠올려 봤다. 이번 주 마감하는 책 진행 상황을 물으려는 걸까. 아니면 내가 이사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걸까.

  사장실에 노크한 뒤 들어갔다. 사장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대리 씨, 다음 주 대만 갈 때 말이야. 부탁이 하나 있네. 우리 회사 좀 잘 홍보해 줘. 마 대리도 알지? 우리가 좀 고리타분하잖아. 이번 기회에 언론 이슈 잘 받아서 매출도 올리고 쇄신도 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 이참에 마대리 덕 좀 보자고.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사장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덕을 어떻게 보겠다는 건지……. 어리둥절한 채로 간신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뒤돌아 방을 나가려 했다. 그때 사장이 나를 다시 한 번 불렀다.

  마대리. 밝게 좀 웃고 다녀. 마대리는 욕심을 좀 낼 필요가 있어. 편집자는 대중의 움직임에 민감해야 해. 안주해 버리면 안 된단 말이야. 알고 있지?

  평소에는 나를 신임하던 사장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눈감아 주었고, 주요 업무는 무조건 내게 맡기면서 좋은 말만 해 주었는데.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변해 있었다.

  네…….

  나는 힘없이 대답하고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이런 구닥다리 회사에서 트렌드는 무슨.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무언가가 잘못돼 가고 있는 것 같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자리에 돌아온 나는 박과장님에게 물어보기 위해 메신저를 켰다.

  박과장님, 혹시 사장님한테까지 얘기하셨어요?

  왜? 사장님이 뭐라고 하셨어?

  과장님, 그러시면 어떡해요……. 혹시 프로젝트 게시 글 댓글에 주인공이 저라고 알린 건 아니죠?

  그럼. 그건 마대리가 직접 알려야지.

  박과장님이 메신저로 대답하고는 링크를 또 하나 보냈다. 링크를 누르니 프로젝트 게시물로 연결되었다.

  어제 퇴근길에 확인했던 것보다 더 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숙박과 교통수단을 제공해 준다는 댓글에 이어 만약 ‘마주봄’ 씨가 진짜로 나타난다면 여행 동영상을 찍고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올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새로운 의견이 올라와 있었다. 그것은 후원해 준 사람들에 대한 보답 차원이기도 했다. 이 의견은 다수의 지지를 받았고,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얼른 ‘마주봄’ 씨가 나타나기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박과장님이 사장님한테까지 얘기한 이유가 뭘까……. 박과장님의 행동에 잠시 화가 났지만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았다. 최근 우리 팀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이번 주 월요일 회의 시간, 사장님이 하반기 주력 도서를 윤대리에게 맡겼다. 파격적인 업무 지시에 다들 놀란 기색을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우리 팀의 박과장님이나 내가 맡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 불문율이 점점 깨지는 중이었다. 새로 들어온 대리로 인해.

  나는 메신저로 박과장님에게 짧게 말했다.

  팀장님, 저 오늘 오후 반차 내겠습니다. 아침부터 속이 안 좋더니, 배탈 난 것 같아요.

  책 마감이 급했지만 중요한 건 거의 처리해 놓은 상태였다. 가볍게 말을 내뱉었지만 스스로도 놀랐다. 이제 거짓말은 대수롭지 않게 할 수 있는 기침처럼 되었다. 반면 박과장님의 나를 향한 배려는 점점 섬세하게 깊어졌다.

  그래, 알았어. 마감이 코앞이니 컨디션 조절 잘해. 그리고 대만 가려면 내일까지는 댓글로 알려야 하는 거 알지? 오늘 집에 가서 잘 고민해 봐.

  출국 3일 전까지 주인공이 나타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티켓 양도가 불가능하다고. 데드라인은 이번 주 토요일이었다. 남은 시간은 단 2일뿐.

  집에 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했다. 이참에 개명을 신청할까. 최근에는 특별한 사유 없이도 대부분 받아 주는 것 같던데. 인터넷으로 급히 검색해 보았다. 신청서를 법원에 접수한다고 해도 바로 처리되는 게 아니었다. 보통 2개월, 아무리 빨라도 최소 일주일은 걸렸다. 개명 신청이 완료된다고 해도 여권을 새로 발급받아야 했고, 여권 발급 소요 기간도 평균 일주일이었다.

  내 몸이 이대로 증발할 수 있다면. 교통사고 났다고 하고 당분간 회사에 출근하지 말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본명을 솔직하게 이야기할까…….

  사장의 철칙대로라면 내 이름이 무엇이든 그건 아무 상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이 회사의 매출을 책임지는 장기근속 직원이었고, 그저 마대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본명을 속인 건 신뢰 문제였다. 본명을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앞으로 내가 하는 말들까지 신뢰를 얻지 못할 게 뻔했다.      

  다음 날, 나는 옷을 두껍게 입고 출근했다. 박과장님에게는 몸살에 결막염까지 겹쳤다고 둘러댔다. 스스로 암시를 걸자 정말 내 몸이 그렇게 변하는 것 같았다. 억지로 기침을 몇 번 하고 나니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먼지 때문인지 잇달아 기침이 나왔다.

  박과장님이 나를 보며 사려 깊은 목소리로 걱정해 주었다.

  오늘 마감일인데 컨디션이 안 좋네. 조금만 더 견뎌. 마감 끝나면 우리 맛있는 거 먹자.

  네, 팀장님.

  나는 오늘 박과장님에게 점심을 같이 못 먹겠다고 할 참이었다.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잠깐 혼자 나갔다 오기로 마음먹었다. 되도록 박과장님과 마주치는 걸 피하기로 했다.

  연신 가짜 기침을 하며 한창 책 마감에 집중했다. 그러다 중간에 짬을 내어 메신저를 클릭했다. 메신저의 새로운 대화창이 열려 있었다. 발신자는 윤대리였다. 윤대리와는 딱히 대화를 나눌 일이 없는데……. 의아해하며 대화창을 클릭했다.

  금요일 모임에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진행했고, 나도 참여하면 좋겠다는 제안. 출판 트렌드 관련 서적을 읽는 모임이지만 정작 만나면 정보를 나누거나 잡담한다고 했다. 최근 자신이 이사한 동네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오늘이 바로 모이는 날이니,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으로 끝맺었다.



  윤대리가 갑자기 내게 이렇게 제안하는 이유가 뭘까.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 사장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안주해 버리면 안 된다는 말. 윤대리를 염두에 두고 나와 비교하는 말이 분명했다.

  사실 모임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모임에 참여하는 게 유리했고, 솔직하게는 윤대리와 친밀하게 지내고 싶었다. 윤대리와 같은 편이 되고 싶었다. 나는 잠시 망설인 끝에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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