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단편소설] 3화
내가 회사에 거짓말한 것은 이번 이사 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본명을 말할 때도 거짓말을 했다. 사장과 회사 사람들에게 본명을 ‘마주봄’이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면접을 보던 중 사장이 이력서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독특하다고 했다. 이름에서 ‘봉’자의 이응 받침을 미음 받침으로 잘못 보고 한 말이었다. 이름 덕분인지 면접이 술술 잘 풀렸다. 나는 결국 내 이름을 고쳐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면접이 끝난 후, 바로 합격 통보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입사 첫날, 회의 시간에 자기소개를 하면서 나는 지금이 기회다 싶어, 떨리는 마음으로 내 이름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안녕하세요, 마주봉입니다.
그러자 저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매력적인 이름이다, 누가 지어 주신 이름이냐, 독특한데 이 회사에서는 못 쓰니 안타깝겠다…….
장편집장님이 나를 보면서 외쳤다.
마사원 씨는 앞으로 계속 마주 봐야겠네!
그러게요! 누가 지어 주신 이름이에요?
당황스러웠다. 회사 사람들도 마주봉이 아닌 마주봄으로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번에도 또 본명을 고쳐 말할 틈도 없이 회의 시간이 흘러갔다.
회의가 끝난 후 주민등록등본과 통장 사본을 주러 회계 담당자에게 갔다. 그때 서류에 정확히 기재된 내 이름을 마주한 나는 아차 싶었다. 내 본명을 알고 회사에 소문을 퍼뜨리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조심스럽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런데 담당자는 서류를 휙 보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내 자리로 가던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후부터 나는 줄곧 ‘마사원’으로 불렸고, 내 본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박과장님이 카카오톡으로 보낸 SNS 게시 글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작성자가 양도한다는 비행기 티켓은 다음 주 수요일 오전 10시 30분 출발, 금요일 오후 7시 30분 도착인 대만 왕복 티켓이었다. 연차를 3일 낸다면 가능한 일정이었다. 글을 다 읽고는 박과장님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 환불 안 하고 양도한대요? 공연 티켓 양도하는 사람은 봤어도, 비행기 티켓 양도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끝까지 읽어 봐. 취소 수수료가 90%라잖아. 환불해도 의미가 없었겠지.
매매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이름도 독특한데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기 어렵지 않았을까? 마대리 영문 철자 어떻게 돼? 일치하는지 확인해 봐.
그 게시물에는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양도받을 수 있는 사람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음, 저랑 영문 철자는 똑같네요.
이런.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무의식으로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대답했는지, 순간 나 스스로도 당황했다. 거짓말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걸까.
진짜? 너무 좋은 기회다! 내가 지금 바로 댓글 달까? 여기 주인공 나타났다고.
에이, 싫어요. 부담스러워요. 제 이름은 이제 ‘마대리’인데요. 그리고 저는 대만 별로예요.
나는 애써 농담으로 화제를 전환하고는 고개 숙여 접시를 바라봤다. 서너 번 집어먹은 것 같은데, 어느새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디저트로 나온 거봉 알 3개 중 하나를 포크로 집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어 왔던 별명 ‘거봉’. 하필 이 과일이 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걸까. 거봉 알을 포크로 찍었다. 자꾸만 미끌거리며 도망쳤다.
온종일 이사와 이름 때문에 업무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얼른 이번 주가 지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몸살 났다고 둘러대고 연차를 내 버릴까.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 주 금요일까지 마감해야 하는 책이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출간한 지 이십 년이 넘어 새롭게 개정판으로 출판하는 철학서였다. 대학교 2학기 개강이 한 달도 남지 않아 제작 기간까지 가늠하면 이번 주에 꼭 마감해야 했다.
퇴근 무렵이 되자 마치 이사한 다음 날처럼 몸이 욱신거리고 뻐근했다. 근육통에 몸살 기운이 올라왔다. 나는 축 처진 몸으로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재빨리 회사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만일을 대비해 평소 다니던 퇴근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갔다. 이사했다고 가정한다면 남양주가 아니라 합정으로 가야 했다. 걷는 내내 우리 집이 합정에 있다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파주에서 버스를 타고 합정역에서 내려 골목길 깊숙한 곳까지 걸어갔다. 혹시 회사 사람을 마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저녁 8시가 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서 있는 곳은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빌라들, 저 멀리 빛나는 편의점 간판과 세탁소 간판,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몇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지금쯤이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합정역으로 갔다. 그리고 지금부터 본격적인 퇴근길이 다시 시작됐다.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까지 갔다가 잠실역 버스 정류장에서 남양주 직행버스를 기다렸다.
문득 스스로가 미련하게 느껴졌다. 이사했다고 거짓말한 게 과연 잘한 일인지 후회됐다. 그렇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거짓말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각하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내일부터 지각만 하지 않으면 곧 이사한 사실은 잠잠히 묻힐 터였다.
내일부터는 다른 길로 새지 않고 곧바로 남양주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회사 사람을 만나더라도 대충 둘러대면 될 일 아닌가.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버스가 곧바로 도착했다. 좌석도 대부분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낮에 박과장님이 보내 준 온라인 게시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사이 댓글이 수백 개 늘어나 있었다. 이참에 개명하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숙박 업체에서 호텔 숙박권을 제공해 주겠다거나, 쓰지 못하고 놓아둔 교통 패스권을 제공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까지 있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윤대리가 나를 보고 있었다.
마대리, 집에 가? 늦었네!
윤대리가 반가워하며 내 옆 빈자리에 앉았다. 순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렸다. 윤대리는 내가 남양주에서 합정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듯했다.
으응. 윤대리는 이 시간에 웬일이야? 남양주에 갈 일 있어?
나 일주일 전에 이 동네로 이사 왔잖아.
정말? 어쩌다 이 먼 곳까지…….
결혼 전에 아내가 이 동네 아파트를 분양받아 놨더라고. 최근에 입주 시작해서 이사했어.
그랬구나. 출퇴근길 멀어졌는데 괜찮아?
휴. 말도 마. 삶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 차 끌고 다니면 너무 밀려서, 그냥 버스 타고 다니기로 했어. 마대리는 그동안 어떻게 다녔어? 나 또 이직해야 하나. 하하.
농담처럼 이직 이야기를 꺼내는 윤대리를 보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경력직으로 들어와 회의 때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피력하고 야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던 윤대리 아닌가. 윤대리는 내가 ‘금요일 모임’에 대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남양주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었다. 얼마 후 윤대리도 내가 합정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터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집으로 가는 게 아니어야 맞았다.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나와 동갑인 윤대리는 석 달 전 경력직으로 입사한 옆 팀의 팀원이었다. 윤대리를 처음 봤을 때는 반가운 마음이 컸다. 마케터 출신의 남자 직원이라는 점, 기혼자라는 점, 아이가 있다는 점 등 나와 처지는 달랐지만 동갑이라는 사실에 친해지고 싶었다. 윤대리와 나는 쉽게 서로 말을 놓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종종 나누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얼마 후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쟁 상대가 되었다.
윤대리는 입사하자마자 모임을 만들어 사장의 신임을 두둑이 받는 중이었다. 매주 금요일 점심시간마다 1층 카페에서 만나는 모임이라고 했다. 멤버는 윤대리가 직접 선택한 사람들로만 꾸려졌다. 사내 메신저로 몇몇 사람들에게만 모임을 제안하는 쪽지를 보냈다고 한다. 모임 목적은 ‘최신 출판 동향 연구’이며, 모여서 관련 서적을 읽는다고 했다. 나는 그 쪽지를 받지 못한 사람 중 하나였다. 모임이 있다는 사실도 한참 지나서 박과장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마대리, 혹시 금요일 모임 알아?
모임? 무슨…… 모임이요?
아, 마대리도 몰랐구나. 윤대리가 조직한 모임이 있더라고. 윤대리 팀 사람들이랑 디자이너, 마케터 몇 명이랑 같이 격주로 금요일 점심시간마다 1층 카페에서 모이나 봐.
진짜요? 모여서 뭐 한대요?
출판 트렌드 관련해서 자료 찾고 책도 읽는다던데. 마대리도 알잖아. 우리 회사 낡고 고리타분한 거. 경직된 회사 분위기를 바꿔 보겠다고 나선 것 같더라고.
그렇구나. 몰랐어요. 팀장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마케팅부 하과장이 얘기해 줘서 알았어. 나한테 같이 하자고 그러는데,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내가 껴도 되는지 싶어서.
그래요? 누구누구 하는데요?
윤대리랑 그쪽 팀장 손차장, 그리고 권사원. 또 장이사 편집장님까지. 디자이너는 황부장이랑 김사원, 마케팅부는 하과장.
쭉 듣고 보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편집부는 나와 박과장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여 중이었다. 타부서 사람들은 일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들이었다. 윤대리는 짧은 시간에 실세를 꿰뚫고 자기편으로 만들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편집장님까지 한다니 의외네요. 다들 그런 데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했대요?
이제까지 다섯 번 정도 했다나 봐. 윤대리 입사하고 나서 거의 바로 한 거지.
다들 하겠다고 나섰대요? 그렇게 의욕 넘치는 사람들이었다니.
응. 나도 의외였어.
얼마나 가는지 한번 두고 봐요. 얼마 못 갈걸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왠지 모를 배신감이 밀려왔다. 젓가락을 집은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점심시간에 윤대리와 같이 밥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윤대리는 내게 모임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주로 내 얘기를 들었다. 이 회사에서 주의해야 할 사람, 사장에게 해서는 안 될 실수들. 윤대리는 의지할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는 눈빛을 보내며 맞장구쳐 주었고, 나는 그 눈빛을 받으며 꽤 흡족했다.
박과장님과 나는 같은 팀으로 이 회사의 주력 업무를 맡았다. 스테디셀러로 인정받은 철학서, 매출이 안정적으로 확보된 대학 교재 등 효자 상품들은 우리 팀 차지였다. 반면 윤대리는 입사한 지 일 년 미만인 경력직들로만 꾸려진 팀에 속해 있었다. 출간하는 책들은 주로 재단이나 학회 등 기관에서 위탁받아 대행으로 제작하는 도서들이었다.
언뜻 보면 우리 팀 도서들이 더 좋아 보였지만 나는 은근히 옆 팀의 책들을 맡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고리타분한 대학 교재보다 이미지가 많이 들어가는 학회 총서, 재단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등이 더 세련되고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옆 팀이 맡은 책을 내가 담당하고 싶다고 티 낸 적은 없었다. 그 책들은 매출 성과가 크지 않을 게 뻔했고, 옆 팀 업무를 탐내다 내 포지션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윤대리는 무척 영리한 사람이었다. 낡고 고리타분한 회사에서 모임을 조직해 참여까지 이끌어 내다니. 선배인 척하며 으스대는 나를 보면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박과장님에게서 모임 이야기를 접한 이후로 나는 밝은 웃음으로 대하는 윤대리의 얼굴을 볼 때마다 무언의 압박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