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단편소설] 5화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박과장님에게 메신저로 말했다.
팀장님, 오늘 점심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 병원에 진료받으러 가야 해서요.
굳이 모임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내가 모임 멤버로 선택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박과장님이 난처할 테니까.
어? 나도 그 얘기하려고 했는데. 오늘 나도 약속이 있어서. 병원 잘 다녀와. 결막염은 다 나았어?
아차차, 내가 결막염에 걸렸다고 했지. 거울을 보니 눈이 멀쩡했다.
네, 오전에 안약 넣었더니 다 나은 것 같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후 박과장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노트와 펜을 챙겨 2층 회의실로 내려갔다. 계단에서 윤대리를 마주쳤다. 윤대리는 반갑게 웃으면서 수락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작고 낮은 목소리로.
회의실에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눈을 마주쳤는데, 놀랍게도 약속이 있다던 박과장님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자, 오늘부터 마대리와 박과장님이 함께하기로 했어요.
윤대리가 기존 멤버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마케팅부 하과장님이 내게 물었다.
마대리, 대만 여행 준비 잘 돼가?
박과장님이 신이 난 듯 맞장구쳤다.
그래. 나중에 나한테 엄청 고마워할 거라니까. 마대리,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면 내가 대신 댓글 달아서 알릴게. 이름 영문 스펠링도 똑같다며.
그 말을 듣고 나자 갑자기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식은땀이 났다.
아니에요, 딸꾹. 저는 대만 안 좋아해요, 딸꾹. 그리고 지금 일이 너무 많, 딸꾹. 많아서 그럴 여유가 없, 딸꾹. 없어, 딸꾹. 없어요.
왜, 오늘 마감 끝나면 다음 주에는 여유 있잖아. 그리고 사장님 지시를 거절할 셈이야? 이야, 마대리 다시 봐야겠는데.
박과장님이 재미있다는 듯 빈정댔다. 그때 권사원이 거들었다.
마대리님, 혹시 돈 빌렸는데 안 갚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뭐 켕기는 거 있으시죠? 저 같으면 당장 간다고 나섰을 텐데 이상해요. 회사에서도 이렇게 밀어주는데. 안 될 게 뭐 있어요.
박과장님이 덧붙였다.
그래, 마대리. 이사하느라 비용 많이 깨지지 않았어? 이번 일 잘 되면 마대리한테도 기회라니까. 연봉도 오를 수 있다고.
순간 나는 윤대리 눈치를 봤다. 아니나 다를까. 윤대리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이사? 마대리 남양주로 이사한 거였어? 예전부터 살던 거 아닌가?
딸꾹, 딸꾹, 딸꾹.
왜? 둘이 무슨 일 있었어?
박과장님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고, 윤대리가 대답했다.
어제 야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났거든요. 글쎄 저희가 같은 버스를 탄 거 있죠. 제가 먼저 알아보고 같이 앉아 갔어요.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변명거리를 급하게 생각해 냈다. 새하얘진 머릿속을 쥐어짰다.
아, 어제는 전에 살던 집에 택배 왔다고 해서 찾으러 갔던 거야.
그런 거였구나. 동네 친구 생긴 줄 알고 좋아했는데, 아쉽네.
후유. 한숨 돌린 것도 잠시, 권사원이 또 얄밉게 말했다.
마대리님, 주민등록증 좀 보여주세요. 혹시 이름이 진짜 ‘마대리’인 거 아니에요? 명함 말고 주민등록증 보여줘야 해요. 하하하.
권사원 말에 모두 깔깔대며 웃었다. 농담인 줄 알았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나는 간신히 웃으면서 대꾸했다.
회사 안에서 누가 주민등록증을 들고 다녀. 지갑도 자리에 놓고 왔다고.
내 대답을 듣고는 윤대리가 이야기했다.
자자, 잡담은 이제 그만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책 얘기 시작해 볼까요?
천만다행이었다. 윤대리 덕분에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오늘의 주제는 SNS를 활용한 출판 마케팅 사례였다. 발제자인 윤대리는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책 리뷰를 올리거나, 유튜브로 책을 소개하는 등 크리에이터들의 활약을 소개했다. 그중 우리 회사 책을 소개하는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며 앞으로 SNS 시장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때였다. 내내 스마트폰만 보고 있던 권사원이 갑자기 나를 보며 외쳤다.
어? 이거 마대리님 아니에요?
권사원이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일 년 전 내가 중학교 동창들과 떠난 대만 여행 사진이었다. 내 친구의 SNS 계정이었다. 거기에는 분명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틀림없이 나였다. 누가 봐도 나.
어? 대만 안 좋아한다면서 이미 다녀왔네?
박과장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사원이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소름! 마대리님 이름이 ‘주봉’이었어요? ‘주봄’ 아니고요? 여기 해시태그에 ‘마주봉’이라고 써 있어요.
나는 발끈하며 대꾸했다.
권사원, 무슨 소리야. 그거 내 별명이라고.
아, 죄송해요. 혹시 마대리님 계정 있는지 찾아봤거든요. 오타로 ‘마주봉’이라고 쳤는데, 대박, 근데 진짜 마대리님이 나온 거 있죠!
권사원, 마대리한테 뭐 감정 있어? 왜 이렇게 얄밉게 구는 거야. 그리고 자꾸 그렇게 본명 부르면 고과 점수 깎이니까 조심해.
윤대리가 다그쳤다.
아니에요, 그런 거. 저 같으면 당장 대만 여행 갈 텐데 답답해서요. 저라도 나서서 프로젝트 게시물 댓글에 마대리님 태그해서 알리려고 했죠. 여기 주인공 있다! 하고요. 제 고과 점수는 제발 지켜 주세요, 윤대리님. ‘마주봉’이 마대리님 본명이 아니라 별명이라잖아요.
권사원이 말하자 모두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우선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만요.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엇, 어디 가세요, 마대리님! 설마 도망치는 거예요?
권사원의 얄궂은 목소리를 뒤로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화장실로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변기에 뚜껑을 내린 후 앉았다.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았다. 덫에 걸린 쥐가 된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았다. 잠시 멈추었던 딸꾹질이 또다시 시작됐다.
딸꾹, 딸꾹, 딸꾹…….
그때 문득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마주봉! 마주봉! 마주봉! 마주봉!
회의실에서 들려오는 함성 같았다. 나는 두 귀를 양손으로 막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새하얘진 머릿속. 곧 주변이 깜깜해졌다.
잠시 후 까만 배경에 거봉 한 알이 서서히 나타났다. 거봉 알은 까만 배경 가운데에서 원을 만들며 굴렀다. 하염없이, 정처 없이……. 나는 눈을 멍하니 뜬 채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