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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유경 Nov 12. 2022

어떤 대리 (1)

[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단편소설] 1화

  오늘 내게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대리.

  사원에서 대리로 승진한 내 이름은 이제부터 마대리다.

  우리 회사에서는 서로의 호칭을 성과 직급으로 불렀다. 윤대리, 하과장, 박과장, 김차장, 황부장, 장이사까지 다양했다. 본명을 부르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실수로라도 본명을 부르면 고과 점수가 깎였다. 동료들은 자신도 모르게 본명을 말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서로를 불렀다.

  마사원, 아니, 마대리. 승진 축하해!

  마대리 언니! 승진 축하드려요!

  사내 메신저에 연신 새 메시지 알림이 떴다. 나는 오늘부터 불릴 이름. ‘마대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여러분은 페르소나를 전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온전한 직원으로 존재해야 하지요. 자기 자신이 아닌, 오로지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책임을 다해 주세요.

  월요일 아침 회의 시간마다 사장은 지루한 말을 반복했다.

  이 회사에서는 명함에도 본명이 아닌 성과 직급을 조합한 이름을 인쇄했다. 업무 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반드시 직급으로 이름을 대신했다. 최근에는 기업마다 직급을 없애는 게 트렌드라는데. 오히려 사회적 흐름에 역행한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직원들은 툴툴대면서도 정작 규칙을 바꾸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시시포스 출판사. 이곳은 대학 교재를 출판하는 소규모 출판사로, 대학 철학과와 국문과, 사회학과 등에서 필수로 선정되는 교재들을 펴냈다. 덕분에 초기 인쇄 및 제작비용을 확보했고, 교수 지인들과 학생들에게 판매하는 수량으로 1쇄를 가뿐히 소진해 손익 분기점을 넘겼다. 그 외에도 정부 기관이나 학회 등에서 출판 용역 일을 꾸준히 받았다. 기본 이십 년은 망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안정적인 회사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회사 시스템이나 분위기가 매우 침체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노동 인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구시대적인 노동 악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전 직원이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했다. 하루 30분씩 공짜 노동을 하는 셈이었다. 또 일 년에 두 번씩 사장의 주말농장으로 워크숍을 갔는데, 처음 간 신입사원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워크숍을 빙자한 노동 행사였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그곳에서 아로니아 열매를 따고 박스에 분류한 뒤 자기 몫으로는 한 봉지씩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직원들은 모일 때마다 연신 한숨을 쉬어댔다. 노동부에 신고해야 한다며 부당한 일이라고 큰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이 일을 신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화는 언제나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회사에 밉보일 일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전부 옳은 말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만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회사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5년째 근속 중인 나는 이 회사에서 편집장님과 우리 팀 팀장님 다음으로 가장 오래 다닌 직원이다. 장기근속의 비결은 이름 콤플렉스를 줄여 준다는 점이 컸다. 이곳에 입사하면서부터 매번 밝히기 부끄러운 이름을 쓸 일이 현저히 줄어들어 좋았다.

  마주봉.

  외할머니가 지어 주신 내 이름. 주봉(主峯)은 산맥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큰 꿈을 가지라며 지어 주신 이름이지만 뜻이 무색하게도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개명을 신청할까 망설였지만 적극적으로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이름 덕에 훗날 재물 복이 터진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부터는 개명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이 회사에 입사하면서부터 개명은 안 해도 되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굳혀졌다. 회사에서는 내 이름을 상기할 일이 없었고, 밖에서도 굳이 내 이름을 밝힐 일이 거의 없었다. 야근이 잦아 친구 만날 일이 줄어들었고, 가족들과 전화 통화도 자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공공기관에서 서류를 발급 받을 때에도 이름 쓸 일이 많지 않았다. 스마트폰이나 계좌번호로 본인을 인증했으니까. 식당이나 카페에서 적립금을 적립할 때에도 핸드폰 숫자만 입력하면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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