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건 그만하고 글을 쓰지 그래요? 그만큼 읽었으면 이제 뭐라도 쓸 때가 되지 않았어요?”
언제부턴가 책에 몰두해있는 나를 보면 아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까지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라고 대답한다.
J.K.롤링도 한 때는 정부보조금으로 생활해야했던 싱글맘이었지만
헤리포터 시리즈로 성공해서
영국에서 두 번째로 부유한 여성이 되었다면서, 엄마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아들은 덧붙인다.
내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드라마 작가가 큰돈을 번다면서
드라마를 써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저 녀석이 아직도 엄마가 돈을 벌어 오길 바라나?’하는 생각에
살짝 섭섭한 마음이 들려 한다.
아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섭섭한 포인트를 이렇게 잘 포착하니
나도 상대하기 어려운
노인이 되어 가고 있나보다.
아들은 모르고 하는 농담이었겠지만
어렸을 때는 나도 언젠가 글을 쓰고 책을 내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탓인지
남에게 읽히는 책을 낸다는 일 자체가
대단히 멋지고 꿈같은 성취라고 생각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닐 때에도
새로운 책을 읽을 때면 늘 작가의 프로필에서 나이를 확인하곤 했다.
그 작가들의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확인할 때면
왠지 마음이 놓이고
나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작가들의 나이가 점점 나와 비슷해졌고
이제는 그들의 나이가 더 이상 나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다.
“그래, 훌륭한 작가가 이렇게나 많은데 뭘 굳이 나까지. 어차피 쓸 얘기도 없고.”
그렇게 시도도 한 번 해보지 않고
나는 작가의 꿈을 포기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작가는 되지 못하더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도 내 자신이나 상대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막연한 생각이나 감정 속에서
자주 길을 잃곤 하는 것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다 보면 다양한 대상과 상황에 대해 느끼는 복잡하고 모호한 감정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각들도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정리가 될 것 같다.
생각과 감정을 정확히 정리하고
표현할 수 있으면
내 삶도 뭔가 방향성과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글쓰기 수업을 찾다가
드디어 ‘치유의 글쓰기’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좋은 글이 갖추어야할 요건과
나쁜 글을 피하기 위한 팁을 배웠고 과제도 주어졌다.
첫 과제는 ‘잊혀진다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를 첫 문장으로 해서
짤막한 글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말을 말로 배울 수밖에 없듯이
글을 쓰지 않고 글쓰기를 배울 수는 없는 일이므로
어떻게든 과제는 꼭 해내려고 마음먹었지만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주어진 문장 뒤에 단 하나의 문장도 이을 수가 없었고
나는 그 이유가 내가 첫 문장에 전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문장을 쥐어짜 써 낸 첫 과제는
그야말로 맥락도 없고 연결도 되지 않는 아무 말 대잔치가 되고 말았다.
두 번째 과제는 ‘여행’에 대한 글쓰기였다. 지난번처럼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첫 문장의 구속이 없으므로
이 번엔 조금 쉬울 거라 생각했다.
과제를 받은 다음 날 도서관에 앉아
그 동안 내가 한 여행들에 대해 생각해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글감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글쓰기가 어려운 것은
글의 소제나 주어진 조건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과제를 제출해야할 시간이 임박한 수요일 오후 다시 아무 말이나 쓰기 시작했고,
첫 번째보다는 좀 길고 좀 덜 엉망인 글을 완성했다.
과제를 제출한 후.
마감에 맞춰 작품을 완성한 작가들이 느낄 법한 해방감을 느끼는 자신을 보며 실소했고,
‘글쓰기의 가장 큰 동기부여는
마감이 주는 스트레스’라는
어느 웹툰 작가의 말에 공감했다.
그리고 반강제로라도 계속 글을 쓰다보면 조금씩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도 갖게 되었다.
누군지는 잊었지만
어떤 작가는 ‘글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와 손으로 쓰는 것’이라 말했고,
<대지>의 작가인 펄 벅도
글쓰기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도록
자신을 강제해야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강제로 글을 써야하는 환경이야말로
작가에게, 아니 나에게 가장 효율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는 위대한 작가들은 샘솟는 영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필휘지로
캔버스에 붓질하듯 글을 쓰는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을 만들지 모르는 채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지면을 채워가는 작가가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한다.
퇴직 후에 집안일과 운동, 취미생활, 여행으로 일상을 채우면서 느꼈던 여유로움은
오래지않아 무능감과 무력감으로 바뀌었다.
자존감을 잃지 않고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조금씩이라도
자신이 발전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있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 조금씩이라도 발전할 수 있으면
그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노년도 조금은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오늘도 아무 말이나 써보려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