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와 필용은 과 선후배 사이다. 우연히 같은 어학원에 다니게 되어 수업을 마치고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낸다.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먹고, 두세 시간 대화를 하는 것이 정해진 일과다. 대화라고 해야 실상은
필용이 일방적으로 허세를 부리며 떠들고, 양희는 그런 필용을 묵묵히 견디며 들어줄 뿐이다. 서로에 대한 호감이나 관심도, 이성으로서의 긴장감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가난한 양희가 수중에 있는
천 원 또는 이천 원을 건네주면
마찬가지로 가난한 필용이 얼마간 돈을 보태 세트 메뉴 두 개를 주문한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양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비가 오네요” 하듯이,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 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일상에, 아니 필용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균열이 생긴다. 게다가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어떨지 알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필용은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매일 자신을 아직도 사랑하는지 양희에게 확인한다.
이 전과 달라진 건 단지 그것뿐이다.
필용이 강박증 환자처럼 묻고
양희는 아무렇지 않게 “사랑하죠, 오늘도”라고 대답하고.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연애행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양희가 역시 지나가는 말처럼 “나 이제, 선배 사랑 안 해요”라고 말한다.
필용은 사랑은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니라며
그녀를 어르고 달래고 매달리다
끝내 저열한 방식으로 그녀를 비난하고 모욕한다.
그들의 무기력한 연애는 이렇게 끝나고
필용은 엄청난 상실감과 자괴감에 괴로워한다.
그들의 연애가 이렇게 시들어버린 것은
소설의 제목처럼 그 배경이 너무 한낮이었기 때문일까?
양희의 사랑에는 열정도 미래도 없다.
가난을 아무렇지 않게 내보일 수 있는 상대인 필용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다.
어느 유명 작가의 책에서 "사랑은 이성에 대한 상상력의 승리"란 귀절을 읽은 적이 있다
로맨스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해서, 그리고 관계에 대해서,
환상과 상상력이란 자양분이 꼭 필요하다.
그녀에게서 상상력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빼앗아간 것은
구멍 뚫린 가난이다.
그저 가난한 현재를 조용히 견디는 것처럼 자신의 사랑도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가난 때문에 그녀의 삶은 언제나 한낮이다. 무자비한 한낮의 볕으로부터
그녀와 그녀의 사랑을 가려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그녀의 사랑은 꽃을 피우기는커녕 시작점에서 한치도 자라지 못한 채
고사하고 만다.
연락이 끊긴 양희를 찾아
필용은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문산에 있는 그녀의 시골집까지 찾아간다.
그곳에서 절망적인 가난을 묵묵히 수용하는 그녀를 보고
필용의 열정과 간절함도
부끄러움과 연민을 남긴 채
시들고 만다.
그로부터 16년 이 지난 어느날,
필용은 종로에서 우연히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연극 포스터를 발견한다. 그것은 그 옛날 양희가 맥도날드에서 늘 끄적이던 연극 대본의 제목이었다 .
연극은 직장인들을 위해 점심시간 사십분 동안 상연되는 미니극이었다.
필용은 매일 점심시간에 택시를 타고 달려가 객석의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양희의 무대를 지켜본다. 무대에서 양희는 전신에 타이즈를 입고 눈만 내놓은 차림이다. 그리고 관객 중 한명을 무대로 초대해 의자를 마주하고 말없이 서로를 응시한다. 연극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공연 마지막 날 유일한 관객이었던 필용이 드디어 양희와 마주앉게 된다.
양희는 16년 전 그날밤 문산의 고향 동네 어귀의 느티나무가 그랬듯이 묵묵히 필용을 지켜볼 뿐이다.
연극이 끝나고 지하 소극장을 나와
필용은 한낮의 세상과 마주한다.
이제 필용은 타인의 무심한, 기대어린, 또는 따가운 시선이 주는 열등감, 수치심, 자괴감 따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관계의 긴장감과 강박증에서 벗어나
한낮의 땡볕에도 무너지지 않는
무심한 나무같은,
고요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양희가 16년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