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년 넘게 나를 ‘아가씨’라는 존칭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나와 동갑내기인 손 위 올케이다. 나도 이십 년 넘게 ‘아가씨’라 부른 사람이 있다. 나보다 세 살 아래인 남편의 여동생이다. 나는 이제 그녀를 ‘고모’라 부른다. 이건 명백히 잘못된 호칭이다. 그녀는 우리 아이들의 고모이지 나의 고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새삼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달리 뭐라 불러야 좋을지 몰라서 가능한 부르지 않는 쪽을 택한다.
‘아가씨’는 <미스터 선샤인>과 같은 사극에서 함양댁 같은 노비가 고애신처럼 고귀하신 양반댁 아가씨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이처럼 사극에서 들을 법한 호칭을 예사로 쓰는 곳이 바로 한국의 시가라는 곳이었다. 며느리는 시가 식구들을 마치 황송하게 상전이라도 부르듯이 아가씨, 도련님, 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 정도면 백 년 전에 폐지된 신분제가 버젓이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면에 남자는 아내의 형제를 아가씨나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고 처형, 처제, 처남이라 부르고 손아래인 경우 이름을 부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존경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호칭이다. 호칭만 놓고 보자면, 며느리는 시가 식구 모두를(자신보다 나이가 더 어린 경우에도) 상전처럼 받들고 공경하고 비위를 맞추고 잘 보여야 하지만, 사위는 처가 식구를 남자인지 여자인지, 손 위인지 손아래인지 구별만 할 줄 알면 된다는 얘기이다. 극단적인 비약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 시대의 실제 남녀의 위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호칭과, 불균형한 호칭의 저변에 깔려있는 성차별적 사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척에 대한 차별적 호칭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오래전부터 공론화되었고 몇 년 전 국립국어원에서 새로운 언어 안내서 ‘우리, 뭐라고 부를까요?’를 펴냈다. ‘특정한 호칭이나 지칭어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 상황에 따라 상대를 배려하고 자유롭게 소통하자’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안내서는 “남편 동생이 나보다 어리면 ‘도련님’, ‘아가씨’ 대신에 친밀도나 집안 분위기에 따라 직접 이름을 부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친가와 외가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안내서가 어떤 규범적 강제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불평등한 호칭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변화한 시대상에 좀 더 부응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국립국어원의 취지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호칭 문제는 복잡하고 애매하다. 가령 오십이 넘은 시동생이나 시누이를 이름으로 부른다면 양성평등에는 부합하겠지만 부르는 쪽이나 불리는 쪽이나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나의 손위 동서, 즉 남편의 형의 아내는 나보다 네 살 어리다. 나는 그녀를 형님이라 부르고 그녀는 나를 동서라고 부르며, 우리는 서로 대충 존대를 한다. 내가 결혼했을 때 집안에서는 우리 두 사람의 서열과 나이가 맞지 않는 점을 우려했지만, 나는 그녀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저항감 같은 것을 느낀 기억이 없다. 그 호칭은 그녀가 내 남편의 형의 아내라는 뜻일 뿐, 내가 그녀를 존경하거나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칭은 호칭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그녀가 나보다 결혼도 먼저 하고 아이도 먼저 낳았고, 심지어 키도 나보다 십 센티 이상 컸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걸 잘 의식하지도 못했다. 그런 그녀를 이제 와서 이름으로 부른다면 치매를 의심받을 것이다.
이렇게 호칭 문제에 관한 한 종전의 것을 더 이상 고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 적용할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는 것도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나는 호칭 문제를 비롯해서 복잡하고 불합리한 한국의 조직문화를 바꾸기 위해, 호칭으로든 지칭으로든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당장은 어색하고 저항이 있겠지만 긴 안목으로 볼 때 달리 묘수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상대가 누구든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수평적 사회여야 가능한 일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복잡다단한 호칭을 쓰는 것은 한국이 수직적이고 권위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임을 방증한다. 우리는 상대가 나이로 보나 위계로 보나 명백히 아랫사람이거나 나와 동등한 경우에만 이름을 부른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상대를 세분하지 않고 편하게 이름으로 부를 자유와 권리를 갖는다. 집안의 막내와 마찬가지로 조직의 막내도 구성원 중 누구도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 ‘위아래도 모르는’ 무뢰한으로 낙인찍혀 가정교육과 부모의 교양까지 의심받을 수 있다. 이렇게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자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종의 금기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친밀감을 보이면 격의 없고 소탈하다고 칭찬받을 일이지만 반대의 경우엔 건방지고 무례한 일이 된다. 한국에서 지금까지 복잡한 호칭과 지칭을 사용한 것은 남녀를 구분하고 위아래를 구분하고 처가와 시가를 세심하게 구분해서, 호칭과 지칭과 마음가짐과 말투와 태도를 달리해야 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불평등과 차별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식으로 여겨지는 사회였던 것이다.
나이와 관계를 따지지 않고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서양식이다. 무조건 서양식을 따르는 것이 좋다거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달라진 사회 시스템이나 사고방식과 호칭의 부조화로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시스템과 사고방식을 되돌릴 수는 없으므로 시대에 맞지 않는 호칭을 바꾸는 것이 좀 더 용이하고 순리라는 이야기이다. 손위 사람이거나 친밀한 관계가 아닌 경우 이름에 '씨'를 붙여 '아무개 씨'라 부르고, 그 외의 경우엔 그냥 이름을 부르면 더없이 심플하고 담백하고 무난하지 않을까? 그리고 서로를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좀 더 활발한 양방향 의사소통과 자유로운 의견교환도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든 눈치 보지 않고 위아래를 구분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