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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두리e May 12. 2023

내 말이 우스워?

[전쟁과 평화]는 1805년에서 1820년까지 약 십오년의 시간을 그려 낸 '레프 톨스토이' 의 대표 소설이다. 오백오십구명의 등장인물들은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전쟁이라는 배경 위에 마치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내듯 그들의 운명은 서로 얽혔다. 인물들은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고 그들만의 생애를 살아갔다. 시련을 극복해내기도 하며, 우주적 자아를 찾아 성장해 가기도 한다. 그 인물들 중에 내 시선을 끄는 유난한 인물이 있다.


중간 키에 곱슬머리와 연한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는 무엇보다 얼굴에서 가장 근사한 선이 입이었다.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기에 그 근사한 선은 더 환히 드러났고, 윗입술은 중간쯤에서 아랫입술을 쐐기 모양으로 누르며 정열적인 인상을 던졌다. 특히 단호하고 뻔뻔하고 영리한 그 눈빛과 어우러져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인상을 풍겼다. 그는 직위가 장교이며 이름은 돌로호프이다. 모든 도박판에 끼였으며, 아무리 술을 마셔도 결코 명석함을 잃지 않았다. 부자도 아니고 연줄도 전혀 없었지만, 자신의 입지를 다질 줄 아는 멋진 사내였다. 그 이유 때문일까? 그는 유독 내 시선을 끌었다.


돌로호프는 3층 창가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밖으로 내 놓은 채 럼주 한 병을 다 마실 수 있는가를 두고 내기를 한다. 창문을 잡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람들의 의심이 싫어서 3층 창문을 모두 떼어 내라고 소리 친다. 한 분별있는 신사가 어리적은 짓이라고 그만 두라고 참견을 하자, 그는 꽉 다문 얇은 입술 사이로 띄엄띄엄, 힘 주어 단호하게 말을 내뱉는다

"누구든 또 내 일에 주제넘게 나서면, 지금 당장 그 자식을 여기에서 던져 버리겠어. 자!"

돌로호프의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이다. 상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모험을 강행하는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상대방에게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돌로호프 내면의 두려움은 자신이 통제당한다고 느끼는 지점이다. 신사의 참견은 그 지점을 건드렸고, 그의 분노는 어김없이 새어나왔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한 자 한 자 체중을 실어 단어들을 내뱉기 시작한다.

내 분노의 순간은 어땠을까?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가슴을 쭉 내미니 어깨가 기역자로 꼿꼿해지는 느낌이다.

" .... 내 말이 ... 우스워?"

책상 위 문제집 위에 올려지기만 한 어색한 손. 연필을 쥐어야되나 말아야되나. 문제를 푸는 척 해야되나 말아야 되나. 고개는 감히 들지 못하고 시선은 책상 위 흐릿한 숫자들에 고정되어, 주인 잃은 우산마냥 오도카니 앉아있다.

"수학이 우스워? 우습냐고?... 묻고 있잖아! "

대답이 없다. 복부에서 부터 쥐어짜낸 목소리는 목구멍을 뚫고 나오자 서슬퍼런 색깔이 되어 동굴 속 같은 울림이 전해지는 듯하다. 프린트물의 많은 문제들이 바닥에 던져져 뒹굴고 있다. 그 위로 쭉쭉 그어진 빨간 색연필 색깔과 정갈하게 인쇄된 검은 활자와 쓰다말다 한 듯한 힘없이 늘어져있는 연필로 쓴 글씨들.

"저번 주에 한땀 한땀 개념짚고 문제풀이 했지?? 복습할 시간도 많이 줬고, 같은 문제들을 다시 푸는데도 불구하고 시험을 어떻게 이렇게 쳐놓을 수 있는거야!! 자네들이 수학을 하찮게 여기면 수학도 자네들을 하찮게 여깁니다. 여러번 얘기했죠?"

"네...." 들릴락 말락한 소리다. 목소리는 목구멍 안으로 깊게 동굴을 팠다.

"자네들은 나도 하찮게 여기는 구나. 내가 수학쌤인데 수학을 제대로 안하면, 나까지도 하찮게 여기는 거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

주먹을 쥐었다. 책상을 있는 힘껏 세게 쳤다. 쾅 !!




녹색 페인트 칠을 한 대문을 지나 시멘트 계단을 재빠르게 올라가면 짙은 나무색 현관문이 나타난다. 현관문을 열면 정사각형의 반듯한 거실과 부엌, 방, 화장실이 한꺼번에 눈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거실 창문이 크긴 하지만 빛을 흡수하지는 못한다. 차르르한 흰색 쉬폰 커튼이 쳐진 안방은 빛을 온몸으로 받아 햇빛을 방 안 구석구석 분사하고 있다. 우리 식구는 항상 안방에서 동그란 나무 밥상 앞에 옹기종기 둘러 앉아 밥을 먹곤 했다. 그 날도 배꼽 시계는 꼬르르거렸고 뒹굴거리며 한 몸이 되어있던 이불을 냅다 팽개치고 엄마의 집밥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그 밥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반찬은 '계란찜'이었다. 초록의 파가 중앙을 수놓으며 흩뿌려져 있고 그릇 한 가득 평평하게 놓인 그 곳에 숟가락을 푸욱 담궈 퍼 먹으면 곧 부들 부들한 감촉이 입 안을 맴돈다. 촉촉한 계란찜의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한 마디 툭 던지셨다.

" 철도 공무원이라고 있는데, 그 거 한 번 준비해봐라. 어떻노?"

갑자기 던져진 말에 계란찜으로 가던 숟가락이 허공에 멈췄다.

"임용고시..그 거 몇 명 뽑지도 않고, 합격하는 게 힘들다 카는데...차라리 철도 공무원 준비해보는게 낫지 않겠나" 텔레비젼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히 던지신다.

나는 밥 먹던 숟가락을 밥상위에 '탁'내려놓고 천천히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야!!!... 방문을 ,일부러, 있는 힘껏, 꽝하고 밀쳤다. 아버지가 이 소리를 들어야된다. 시작도 안한 시험을 실패로 단정짓는것이 싫었다. 내 의견은 무시했다. 내가 미리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분노스러웠다. 나는 아직 출발선에조차 서지 않았다고!! 2년 여를 독서실 깜깜한 구석에서 혼자 버텼고, 아버지의 '선 넘은' 노파심 덕분인지, '두고 봐라'는 나의 분노 덕분인지 합격의 휘날레를 용케도 울릴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방구석 분노 이후 5개월 뒤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승용차 없이 1시간을 넘나드는 출퇴근을 하시는 아버지의 어깨를 한번도 주물러 드리지 못했다. 힘들다는 내색도 잘 안하셨지만 힘드시냐고 다정히 물어본 적도 없었다. 아버지께 보인 첫 감정표현은 이렇게 '분노'였다.


의견을 묻지 않는 아버지에게, 한땀 한땀 가르쳐주어도 제대로 변화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내 뜻대로 되지않고 방해하는 것들에게, 나는 통제당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무능함을 인정하기 싫었다.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내비치는게 싫었다. 더 세게 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돌로호프는 내기를 제안하고 의심을 떨치기 위해 창문까지 뜯어내라고 한다. 위험을 알리며 중지하려는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3층 창문에서 밖을 보려다 기우뚱하는 수병을 끌어 당겨준다. 그는 모험을 좋아한다. 모험을 즐기려고 할 때마다 누군가 나를 통제하는 상황이 싫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돌로호프를 닮았을까. 그래서 돌로호프를 인정할 수 있었을까.


돌로호프는 뒷덜미의 곱슬머리가 루바시카 옷깃에 살짝 닿을 만큼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병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며 안간힘을 다해 점점 더 높이 올렸다. -전쟁과 평화 민음사 p84-


그는 주제넘게 아무도 내 일에 나서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부들부들 손을 떨며 안간힘을 다해 버틴다. 내면의 연약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 혹은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더욱 더 강한 갑옷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나는 돌로호프 내면의 연약함과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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