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끝, 쨍하게 칠해진 초록색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법 큰 시멘트 마당이 펼쳐져 있다. 대문 오른쪽으로 2층을 향해 있는 시멘트 계단이 나타난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서 다다른 짙은 나무 무늬 현관문을 열어 젖힌다. 어둑한 실내가 눈에 들어오고 그 바로 왼쪽으로 안방이 있다. 안방 창문 앞에는 주말이면 내가 끼고 사는 조그마한 텔레비젼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일요일 오후 2~3시만 되면, 텔레비전에 빠져 들어가 버릴 것처럼 코를 박고 있다. 겨울방학과 함께 시작하는 ‘농구대잔치’는 ‘나의 팬덤 일기’의 시초였다. 농구 선수 허재의 골수 팬이었다. 허재, 그의 별명은 ‘코재’라고 불릴 정도로 얼굴에서 코의 비중이 독보적이다. 농구 코트를 종횡무진하며 볼을 적재적소에 공급하고, 득점으로 연결시키기도 하며, 한 번씩 보이는 덩크 슛은 '멋짐'의 끝판왕이었다. 농구코트 속 3시간의 모습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오로지 내 눈은 ‘내 선수’만 따라가기 바빴다. 그는 내게 첫 스타였다.
왜 그렇게 난생 처음 소위 말하는 ‘스타’에 빠졌던 것일까?
그가 흘리는 열정적인 땀방울의 매력에 빠졌을까? 천부적인 재능도 물론 있겠지만, '농구천재’라 불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몰입하고 임계점을 넘어서는 경험을 했을까? ‘천재’란 말의 어감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그 무엇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화면 속에 펼쳐지는 농구 천재의 모습은 타고난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심장 쫄깃한 경기를 통해 그의 피땀이 보였다고나 할까. 열정을 가지고 몰입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매력적 이었다.
팬덤(fandam)은 특정한 분야나 인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그런 문화 현상을 말한다. 흔한 말로 ‘ 오빠(누나) 부대 ’ 라고 불리기도 하며 ‘ 워너비 (Wanna be)’ 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이러한 팬덤 문화가 있었으니 그는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등장하는 ‘피타고라스(BC 582?~497?)’이다. 터키 앞 바다인 에게 해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피타고라스는 수학 역사상 가장 신비에 싸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여행으로 쌓은 수학적 능력
고대 여러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피타고라스는 이집트의 수학을 배우던 중 이집트가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을 때 포로가 되고 바빌론으로 끌려간다. 그 곳에서 좀 더 발전된 수학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의 나이 40세였다.
크로톤에 정착. 피타고라스 학교 설립
그는 고향을 떠나 크로톤으로 가게 되고, 피타고라스 학교를 설립한다. 600명의 제자들이 몰려들었고, 누구든지 이 학교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헌납했고 탈퇴 시에는 처음 헌납한 재산의 두 배를 받아나갈 수 있었다. 엄격한 규율이 있었고, 모든 연구 결과는 ‘피타고라스’의 이름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피타고라스의 수에 대한 철학
만물을 이루는 근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라고 보았다. 세상 모든 만물이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 것이다. 자연은 수의 규칙에 따라 형성되어 있고 그 규칙을 알아낸다면 만물의 이치를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을 이루는 것들에 대한 그의 철학적 호기심은 수에 머물렀다. 그만큼 명료하고 확실한 것이 어디 있으랴
또한, 수학은 영혼을 정화해준다고 생각했다. 수학은 순수하고 완벽한 세계, 그 자체이며 그래서 언제나 변함이 없다고 여겼다. 수학 문제를 풀다보면 어느 순간 놀라운 발견을 하고 그 때 우리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한다. 피타고라스는 혼탁한 세계를 사는 인간이 수학을 통해 영혼을 정화해야한다고 믿었던 셈이다. 피타고라스 학파에는 그런 종교적 신념과 수학이 어우러져 있었다.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의 '형부대'들은 수학에 대한 열정과 철학으로 팬덤을 이루며 뭉쳐져 있었다. '오빠부대'나 '팬덤'은 우리네 열정의 표출이다. 몰입할 열정이 있고, 쏟아낼 뜨거운 감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 중년들은 요즘 빠져들만한게 없다라며 한숨을 쉬는 날이 많다. 그래서 'BTS의 아미'나 '김영웅 트로트의 팬덤'도 무척이나 좋은 현상이다. 빠져들만한 무엇인가가 있는 인생은 더 풍요로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