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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두리e Feb 06. 2024

여름 + 풋사과 = 버스 정류장

여름에 대한 기억

6월의 갑자기 이른 더위는 숨이 막히게 했다.  텔레비전에서는 88 서울 올림픽을 쉴 새 없이  방송하고, 우리나라가 갑자기 잘 살 것처럼 떠들어 대었다, 하지만 좁은 교실은  육십 여덟 명의 꽉 찬 책상과 의자에, 책상과 책상 사이에는 사물함 대용 박스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발만 겨우  디딜 수 있는 교실에 고작 선풍기 4개만으로는 후덥지근함을 막을 길이 없었다.


대구 시내 고등학교 중 유일하게 야간 자율학습을 시행했던 우리 학교는 자율학습을 반대하는 전교생 서명을 돌리다 교무실에 발각되었다. 우리는  꼬리 내린 생쥐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


야간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 앞 정류장에 내가 탄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은 늘 밤 9시 30분이었다. 익숙한 밤공기, 한참 전에 문을 닫았을 토큰 판매소, 정류장 푯말을 희미하게 비추는 뿌여스럼한 가로등 불빛, 가로등 너머 어둠 속에 잠든 아파트의 흐릿한 형체들, 간혹 자동차만 몇 대 지나가면서 바람을 일으켰다. 나는   아파트 사이에 난 골목길로 200미터는 걸어 들어가야 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는 순간, 내 귓가를 때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와. 못 알아본다니! "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라 겁도 났고, 횡단보도 건너편에 엄마의 모습이 혹시라도 보일까 싶어, 뒤돌아 볼 생각도 없이 앞만 보며 급히 발을 내디뎠다.




몇 주전의 일이었다.

몇 달 동안의 야간 자율학습에  지쳐가던 중 동갑내기 남자사촌은  4: 4 미팅을 제안했다. 토요일 하교 후 친구들과 시내의 카페로 들어섰을 때, 안 쪽 깊숙한 곳에 사촌과 덩치 남자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나오기로 한 친구가 취소를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붙잡혀 왔다는 그 아이는, 키가 나보다  사람 머리 하나만큼  더 고, 남자애 치고는 하얀 피부,  웃을 때 보이는 선한 눈매에 파르스름하게 깎은 뒤통수가 동그마니 이뻤다. 그날, 버스 정류장에서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 아이를 못 알아본 것이다.  


우리  가까이에 그 아이의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의 학교는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았지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내가 타고 오는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나선 것이었다.

밤 9시 30분. 버스 정류장에서의 만남들안부만 짤막하게 묻는 찰나의 시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 그 아이의 도서관 공부는 꽤 계속되었고, 정류장에 내리기 한 코스 전부터 가슴이 요동치는 날들도 늘어갔다. 버스가 미끄러지며 정차하는 그 영겁 같은 시간 동안  동공을 최대한 크게 뜨고 그 아이를 찾았다. 오늘도 있을까? 오늘은 도서관에 있지 않고 빨리 가버렸을까? 정류장에 안 보이면 어쩌지... 안 보일 수도 있지... 그 애는 뭐  맨날 도서관에 남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없나? 진짜?... 


희미한 가로등불 아래 버스 정류장은 조용했다. 풀리지도 않은 신발끈을 애꿎게 다시 풀었다 동여매고 나니, 함께 내린 사람들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몸을 일으키는데, 낯익은 운동화가 보였다.


"생일 축하해"


갈색 박스 상자하나를 팔을 쭉  훅 내미는 바람에 나는 조금 뒷걸음을 쳤다. 슈퍼마켓을 털었는지 갈색 상자 안에는 색색의 과자봉지들이 서로 얽혀 뽐을 내고 있었다.


" 시간 딱 맞춰 오려고 했는데, 들고 올 것들이 많아서 좀 늦어버렸네. 많이 늦은 거 아니지? 기다렸어?"


여름의 진득하고 습한 공기가 상쾌하게 바뀌는 순간, 뛰어왔음이 분명한 살짝 거친 숨소리, 가로등 불빛은 늘 희끄무리했지만 그 애 앞에서는 갑자기 밝아지는 듯했던 밤 9시 30분,  그 밤의 버스 정류장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만물이 생동감 있고, 더움이 곳곳에 진을 쳐도 우린 과감히 뛰어나가 여름에 승부를 건다. 대학 때는  MT를 떠나고, 친구들과 태양샤워를 하며 해수욕을 했고, 상상하지만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로맨틱한 일을 또 상상하고, 부서지는 파도, 이글거리는 태양, 우리들의 웃음소리는 늘 귓가를 때렸다. 

생동감 있는 여름은 그래서,  경험을 하러 뛰어나가고, 그 경험들을 기억하고, 그래서 여름은 기억의 맛들이 서로  다른가 보다.


버스 정류장,

맑은 웃음,

희미한 가로등

갈색의 과자 상자

밤 9시 30분


우리만 마치 다른 시공간에 있는 것처럼, 우리를 감싸던 공기는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던 1988년의 여름밤,  풋풋한 여름 사과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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