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내 뒤통수를 지나 귓볼을 타고 관자놀이를 지나간다. 길고 실처럼 생긴 많은 뉴런들은 저마다 힘자랑을 하며 그것을 빠르게 전달해 댄다. 어느새 분노는 고랑과 이랑으로 이루어진 뇌 표면의 깊은 주름들 사이를 '우드득,우드득' 거리며 후벼댄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탁.. 탁.. 탁.. 탁
나는 매끈한 결의 나무책상 위에 검지 손가락을 힘주어 찍는다. 정적이 가득한 교실에 '탁탁탁' 소리만 들린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이의 까만 정수리 너머 흔들리고 당황한 눈동자의 불안한 시선까지 느껴진다. " 같은 문제들을 다시 푸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풀어놓을 수 있는 거야!! 수학이 하찮나요?" "아니요...." 모기만 한 소리다. 목소리는 목구멍 안으로 깊게 동굴을 팠다. 주먹을 쥐고 책상 위 상판을 한 번 쳤다. '쿵'소리와 함께 책상 위 도자기로 만든 꽃무늬 커피잔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학생들의 정기 시험 일정이 잡히고 날짜가 다가오면 손은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표정은 수시로 사나워지고, 피는 역류하는 것 같다. 역류했던 그것은 흩어지면서 창백해졌다가, 다시 온몸의 열과 에너지가 얼굴로 쏠릴 것처럼 목 위로 피가 몰려 뻘게진다. 튀어나올 듯 부릅뜬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고, 목소리는 군인처럼 굵어지고 딱딱해지며 소리를 질러댄다.
"똑바로 안 할 거야?? 시험이 얼마 남았다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할 것 같으면 집어 쳐!!" 분노는 소리로 온다.
분노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두려웠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싫었다. 무언가를 잘못한 아이들에게 명쾌한 벌칙을 내려야 했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분노가 한 번 휘몰아치고 지나가면 화살은 다시 나 자신에게로 꽂힌다. 왜 참지 못했을까. 고함을 치거나, 나 화났어, 나 이런 사람이야 우습게 보지 말라고, 나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봐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행동 말고도,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다른 사다리들이 있지 않았을까. 밀려드는 후회와 아쉬움은 내가 구겨버린 시험지 같았다. 내면 속은 폭풍우가 휘몰아쳤고, 자신의 연약함에 매몰되어 수업 후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나는 소그룹으로 초. 중. 고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사교육 선생님이다. 분노가 많다. 지각을 하거나, 과제가 덜 되어 있거나, 개념 공부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는 화가 난다. 학원이란 아이들이 처음으로 부딪치는 작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주어진 규칙과 약속을 잘 이행하는 것은 어떤 사회에서든 우선이다. 그래서 규칙을 무시하고 어기는 경우는 그에 따른 벌칙을 주려고 애쓰는 편이다. 사교육은 선생님과 학생의 메타포도 중요하지만, 성적 향상이라는 뼈 때리는 과업도 완수해야 한다. 성적 향상에는 피나는 노력이 뒤따르는 법이니깐.
소개로 아이들을 맡고 학원을 운영하는 소그룹 학원은 성적이 좋은 아이들만을 가르칠 수는 없다. 고등학교 4등급에서 6등급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들도 태반이다. 그들은 수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결손이 많고 개념을 제대로 집어넣는 메타인지력도 희박하며약한의지력과 제대로 잡히지 못한 습관까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가 힘든 아이들이다. 수학 공부의 단계를 쌓아가지 못하고 한 단계라도 자칫하여 놓친다면 '수포자'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다.
나는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는다. 규칙을 어기고 자신의 게으름에 매몰되는 아이들에게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도 이 가능성을 차단하는 그들이 안타까워서 이기도 하다. 에니어그램 상담기법을 응용한 심리학을 받아들였고, 아이들의 기질과 본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분노가 많은 선생님은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수학 문제를 풀 듯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공부했다. 분노를 조절하고 달라진 호흡을 통해 아이들을 기다렸다.
누구든 화가 날 수 있고, 화를 내는 건 쉽다. 하지만 화를 내야 마땅한 사람이, 마땅한 시간에, 마땅한 정도로, 마땅한 목적을 가지고, 마땅한 방식으로 화를 내는 것은 모두가 가진 능력이 아닐뿐더러 쉽지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분노가 전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선 시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확한 지점에 놓이기만 한다면 분노도 쓰임이 있다고 믿었다. 따스운 분노도 있다. 나도 분노의 좋은 쓰임새를 믿는다.
이 이야기는 수포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들이 수학을 이겨내고 자신을 완성해 가는 이야기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