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두리e Mar 03. 2024

수학에 온기를 담다

온기는 너의 생을 꽃피우고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중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고 3년째 되던 해인 1998년, 3학년 여학생 32명의 담임을 맡게 되었다.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들은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담임인 듯, 이웃집 언니인 듯, 친근함을 발휘해 주었고, 나는 서른두 명의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소녀들의 청춘과 꽃 피워가고 있을 소망들이 몽땅 궁금해 모둠일기를 쓰게 했고 학급 문고를 편찬할 야심 찬 목표들까지 세웠다.  


1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일곱 명의 우리 반 아이들이 5, 6교시 특별활동 시간에 사라졌다. 그러니까 무단으로 수업을 빠진 것이다. 각 학년마다 2 학급, 전체 6 학급의 200명도 채 되지 않는 면 소재 시골 중학교에서는 청명한 하늘이 갑자기 노랗게 되고도  남을 놀랄 일이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운동장은 햇빛을 그대로 흡수해 구석지고 후미진 곳의 철봉마저 빛이 났고 특별 활동 시간을 맞이해 배드민턴,  농구, 축구의 다채로운 동작들은 평상시의 황량함을 잊고 요란했다. 운동장 끝에는 마을로 이어지는 작은 초록색 문이 하나 있었는데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여기저기 녹이 슬어 있었다. 항상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문으로 일곱 아이들이 사라졌다.


특별활동이 끝나갈 무렵 아이들은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부재는 교무실에 알려졌고 소녀들은 훈육실로 불려 왔다. 일곱 아이들은 마을로 이어진 길을 걸어 한적한 연못이 있는 곳에 줄곧 앉아 있었다. 조용하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에서 서로의 고민은 이어졌고 그것은 학교 선생님들이 우리를 싫어한다는 생각의 일치를 만들어 냈다. "죽어 버리까"라는 누군가의 외침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같이 손을 잡고 연못 속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들이 우리들만 야단친다는 생각,  그냥 한 행동인데 튀지 말라는 다그침, 우리를 쳐다볼 때만 다른 매서운 시선들,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는 서러움과 억울함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 나 생리 중이야!!"


그 말 한마디에 아이들은 얼른 되돌아왔던 길을 돌아왔다.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에 그 깟 생리가 무슨 대수이겠냐마는 누군가가 옷이 젖을 수 없다는 당위성을 준 것만으로 심장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학생부장인 체육 선생님은 훈육실에 제일 먼저 들어가 아이들의 따귀를 때렸다. 나이가 제일 많으신 선생님은 아이들의 잘못을 짚어주셨고 옆자리 국어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로하며 달랬다. 시골 작은 중학교는 워낙 학교가 작아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손바닥 안이었으며 학생들 개개인에게 관심이 많았고, 모두가 소녀들의 담임 선생님인 셈이었다.


정작 담임인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녀들은 사랑받고 싶었음이 분명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다르니, 선생님들은 수련회 때 남자아이들의 텐트에 들어간다던지, 우르르 몰려다니는 튀는 행동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개성에 따라 그리 행동하며, 중간에 끼인 나는 선생님들의 입에 오리 내리는 일곱 소녀들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무단 수업 결석은 야단맞을 일이고 무분별한 행동이었지만, 그 너머, 사랑받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혜민이는 중학교 2학년 처음으로 수학 사교육을 받으러 왔다. 초등학교 5학년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결손이 군데군데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5학년 과정부터 다시 짚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년 동안의 투자는 수학에 대한 완벽한 해석은 힘들더라도 자기 학년의 과정을 잘 완수해 가기 시작했고 3학년이 되어서는 심화과정 문제집을 건드리며 조금씩 질문력도 생겼다.


모르는 거 있으면 반드시 질문해... 개념은 꼭 이해하고 암기해야 돼... 빨리 풀 필요 없어, 계산과정은 꼼꼼히 적고 오래 걸려도 일단 정확도가 최고야.


혜민이는 내가 하는 말을 잘 지키려고 노력해 주었다.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날 배운 것은 그날 공부하고 숙제를 했다. 하루가 지나면 기억의 70%가 사라지는 망각법칙을 거스르기 위해 철저하게 복습을 했다. 혜민이는 여동생과 함께 수학을 배우러 다녔는데,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오늘 이거 선생님이 꼭 물을 것 같아, 언니 외워 봐"라는 친절한 솔루션을 주었고 혜민이 또한 충실히 이행했다. 사실 여동생은 수학적 학습 능력이 우수해서 두 자매가 배우는 과정이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혜민이는 동생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지 않았을까? 잘 알 수는 없지만 함께 공식을 외운다는 혜민 어머니의 말씀은 혜민이가 어느 정도 극복하고 받아들였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느린 혜민이가 수학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려 준 어머니의 믿음은 내 심장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혜민이는 3년 동안 수학을 포기하지 않고 진득하게 일궈서 여러 작은 성취를 이루었고 올해 봄, 미술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단호한 뜻을 밝혔다. 이제껏 무언가를 해 보고 싶다는 의지를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아이였는데 말이다.


2 때부터 지금까지 잘 가르쳐 주시고 제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도록 알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3년 동안 그래도 뭔가를 열심히 했다고 하면 수학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진짜 3년 동안 너무 감사했고 배울게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감사했습니다 ♥


미술 공부를 시작해 수학을 그만두던 날 소녀는 작은 손 편지를 주었다. 그녀가 경험한 것은 단순히 수학 문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수학보다 온기였다. 서로가 주고받았던 작은 온기로  이해하고 받아들임이 만들어 낸 시간이었다고 조용히 속삭여본다. 역시나 사랑은 힘이 쎄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받고 싶은 것은 아이들의 본능이다. 그것을 잘 읽어 주는 것 만이 내가 가장 먼저 해야 될 임을 꾹꾹 힘을 주어 심장에 새겨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