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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두리e Feb 25. 2024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듯이

개념을 배웠으면 3년을 기억해라


M군은 통통하고 하얀 볼에 검은 안경테 너머 선한 눈매가 도드라져 보이는 아이였다. 말수가 적고 조용했으며  슬쩍슬쩍 던지는 내 농담에 맞춰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졌다 싶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곳곳에 눈이 내리고 삼한 사온의 기온이 무색한 겨울의 한가운데 였던 작년 12월, M은 감기가 걸려서 목소리도 갈라지고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 5개월 동안 이어진 수업동안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었는데 결석도 하루 걸러 하루씩 반복했다. 그러다 무사히 수업을 온 날은, 볼이 홀쭉해져 있었고 뽀얗고 윤기 나던 피부도 꺼슬꺼슬해진 모양새였다.


12월 말, 인문계 고등학교 입시 발표가 있었다.

내신 성적이 커트라인 점수에 걸려있던 아이는 혹시나 불합격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마음을 졸인 것이다. 걱정은 초조와 불안을 몰고 와  움츠러들기가 지구 반대편을 뚫고 나올 정도였고  게다가 감기에 한 번 걸리고 나니 몸을 추스를 수도 없었다. 생애 최초로 겪는 고역의 순간이었을 터.


결국 M은 떨어졌다. 2주 후 입학 자리가 있는 곳이 교육청에서 추가로 발표되었지만 여의치 않아 M은 공업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아이는 1학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전학을 겠다는 목표와 함께 고등학교 입학 건은 일단락 지어졌다.


문제는 M의 공부방식이다. 수학을 공부하려면 6개의 능력을 기본적으로 고양해야 한다. 암기력, 기억력, 집중력, 성실성, 문제해결력, 이해력이다. 어떤 대상이 가지고 있는 여러 특징을 비교분석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육각형 이미지를 '헥사곤 그래프'라고 하는데 이 그래프 기준 축까지 끝까지 꽉 차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인간을 육각형 인간이라 한다. 수학에서 필요한 능력을 모두 갖춰 육각형 인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렇지 못하다면 다른 요소를 캐리 하는 원동력인 암기력, 기억력, 집중력만이라도 갖춰야 한다. 개념의 이해가 무엇보다 우선이고, 개념을 암기하고 기억하는 것은 개념을 장기기억에 저장하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즈음 아이들의 이해력이야 두말할 필요 없이 탁월하다.

"개념을 배웠으면 3년을 기억해야 한다"

수학 공부의 핵심은 이거다! 그리하여 나는 강력하게 수학은 암기과목이라고 주장한다. 2500년 인류의 역사와 나란히 함께 해온 수학, 그 역사의 내용을 배우는 고등학교 교과서는 일단은 개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외워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지 않는가.


3년 기억론을 펼치는 이유는 외우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며 복습을 통해 제대로 머릿속에 넣고 인출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모르면 문제집 뒤적뒤적해서 개념 보며 적당히 베껴 과제를 해 낸다. 이렇게 공부하는 것은 수포자로 가는 지름길이요, 썩어빠진 동아줄을 잡고 있는 것이며, 공중에 붕 뜬 다리를 건설하는 것과 같다.

 

M도 그렇게 공부한다. 도무지 외워오지를 않는다. 너무나도 외우지 않아 빡빡이를 시켰더니 300번 쓰기 레전드 기록을 세웠다. 자신의 빡빡이 신기록을 자신이 경신해가고 있는 중이다. 학교 때  선생님이 아침마다 연습장 귀퉁이에 붉은 도장을 찍어주면 뭐든지 공부해서 연습장을 빡빡하게 채워야 했던 그 무시무시한 빡지말이다. 빡빡이 하기 싫어 공부까지 포기했다는 무서운 전설이 있는 그 빡지를 시행하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쓰게 하기 위함이다. 어쩌다, 외워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말이다. M은 그래도 잘 외워오지 않는다. 책만 뻔히 쳐다보며 눈으로만 보고 학원을 온다. 백지에 적어서 백지 테스트를 해야만 온전하게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이며 자는 아이 벌떡 일으켜 세워서 공식을 물어도 줄줄줄 나올 수 있게 된다. M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진실로, 복장이 터진다.





고 이어령 박사의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듯이>라는 글이 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줍니다. 물은 그냥 모두 흘러내립니다. 아무리 물을 주어도 콩나물시루는 밑 빠진 독처럼 물 한 방울 고이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콩나물은 어느새 저렇게 자랐습니다. 물이 모두 흘러내린 줄 알았는데, 콩나물은 보이지 않는 사이에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매일 콩나물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물만 주고 검은 천으로 덮어 놓기만 했을 뿐인데 콩나물시루 안 콩나물은 어느 순간 줄기가 쑥쑥 자라 노란 대가리를 쏙 하며 빼꼼히 내보인다. M은 내게 콩나물과 같은 존재다. 밑 빠진 독이 아니라 내가 주는 물을 조금 느리게 흡수하며 천천히 자랄 뿐이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마음의 자세를 배우며 나도 또 한 번 성장한다.


M에게 매일 한 장씩의 개념 공부 과제를 준다. 보고 보고 또 보라는 뜻으로 내어주면 M은 주어진 과제라 안 하면  혼날 것을 아는 지라 어찌 되었든 보고 보고 또 보고 온다. 몇 개는 틀리고 몇 개는 헷갈려하고 몇 개는 알고 넘어간다. 그래서, 아이가 작은 성취를 자주 이루었으면 좋겠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 가는 꿈을 당당히 실현하기를 바란다. 자기를 잘 사랑하는 경험을 온전히 누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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