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9화 _ 그냥, 가만히 웃어줘요. ]
“좋아합니다. 해인씨.”
“헉!”
불쑥 뱉어져 나온 세현의 돌직구 고백에 당황한 해인.
하지만 그렇게까지 엄청나게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이제까지의 행태로만 봐도 어느 정도 전달되어지는 게 있었으니까.
분명 눈앞의 이 남자 싫지 않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들로 자신 안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대로 새로운 관계로 발전되어 버린다면...
“이런...상황이면 난 뭐라고 해야 되는 거예요...?”
쑥스러움과 어색한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해인은 얼굴을 붉히며 되려 세현에게 물었다.
“그냥...”
세현은 새초롬하니 어쩔 줄 모르고 있는 해인의 어깨를 끌어다 살포시 안으며 얘기했다.
“그냥 가만히 웃어 줍시다. 죽어도 싫은 건 아닐테니...”
작은 체구의 해인은 세현의 품에 쏙 안겼다.
서로 안기어 있기에 얼굴은 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세현은 해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쉽게 상상해낼 수 있었다.
불안감에 이리저리 떠도는 동공.
어쩌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 겨우 안긴 세현의 옷 덜미를 살짝 잡은 손, 이 여자는 정말 너무 알기 쉽다.
“나는 아직 할 게 있어 준비가 안 된 거 같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뭐 이런 생각하고 있죠? 지금...”
"......"
한참을 안고 있다 서로를 놓아주고는 세현은 해인의 양 볼을 가볍게 꼬집어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다 알아요...! 나도 지금 비슷한 상황인걸 뭐...!!
근데, 그 준비라는 거 말이죠, 언제 완성 되는 건지 보통 잘 몰라요, 사람들...!“
“나...난 정말로 다 버리고 온 거라 생각했어요.
운 좋게도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지금이 너무 좋고요...”
동질감을 떠나 실제로도 세현 자신과도 너무 비슷한 상황에 있는 해인.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만
해 주어도 바로 공감을 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정말로 다 버리고 온 거 맞죠??”
“에? ...예, 맞죠... 정말 이거만 생각하고 다 내려놓고 바다 건넌 거니까.”
“그럼 지금 다 비어 있다는 거잖아요.
나도 텅텅 비었어요. 알잖아요. 내 상황도...”
해인 역시 지금까지 알게 된 눈앞의 이 남자의 인생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인정하고 넘어서기 위해 정말 많은 가진 것들을 포기하고 이 길을 선택한 남자.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더한 결심과 인내의 세월이 있었을지 모른다.
“새로운 걸 채우려고 비운 거잖아요? 그게 인간관계가 되었건, 글이 되었건, 그림이 되었건...”
“그건...그렇죠...”
세현은 꼬집고 있던 해인의 볼을 놓아주고 살짝은 발그레해진 볼을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그럼 둘 다 지금 텅텅 비어있는 거예요.
그럼 인제부턴 새로운 걸 하나 둘 다시 채워 넣어야죠.
나도 해인씨도 인생 2막인데, 2막을 여는 시점에 일단 제일 넣고 싶은 것부터 넣읍시다.”
“에...”
“나도 절실하게 하고 싶은 거 찾아 직장 떠나고 집 떠나 나왔어요.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는 거, 해야 하는 거... 이건 어떻게 보면 다를 수도 있지만요.
이거 세 가지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거라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지금은 그게 해인씨 같으니까...!”
해인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일본에서부터 이어졌던 눈앞의 이 남자와의 인연.
마주치고, 도움 받고, 푸념하고... 자신도 모르게 어딘지 의지되기 시작했던 이 남자에 대한 호감은 이미 차 올라있는 지 모른다.
그렇지만 소심한 해인에게 문제는 늘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자신이었다.
감정을 드러냈다가 상처받기도 두렵고, 그 상처로 인해 자신의 앞날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더 두려웠다.
복잡한 생각에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 해인에게 세현이 이어서 말했다.
“저번에 아비뇽에서 그랬었죠? 연애 포기했다고, 보통 남자들이 원하는 연애 형태라는 거 뻔한데, 본인은 그걸 맞추어 줄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네... 그래요”
“봐요, 나는... 보통남자 같아요?”
“에? 음...일반적이진 않죠...”
“그렇죠? 나는 보통사람이길 거부하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에요.
연애? 뭐가 연애에요? 그냥 좋아하는 사람끼리 서로 마음 알고 의지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에요.
해인씨는 아직 성장해야 되는 사람이고,
그걸 어떤 식으로든 방해하면 안 되는 거예요."
시선을 어디로 향한 건 지 알 수 없이 아래쪽의 어딘가를 응시하며 해인은 세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바라고, 집착하고, 소유하고...
해인씨가 말하는 보통의 연애가 그런 거라면, 나도 그런 쪽으론 별로 적응된 사람 아니에요.
근데 내가 볼 때 해인씨도 보통 여자는 아니거든...!
난 그런 해인씨가 좋은 거예요. 응원하고 같이 성장하고 위로받고... 그런 상대로서..."
한동안 말이 없던 해인.
갑자기 눈을 감고 입술을 살포시 깨물며
한발자국 앞으로 세현에게 다가와 기습적으로 세현의 가슴팍을 때렸다.
[ 퍽! ]
“아야! 엥!!?”
예상치도 못하게 한방을 먹은 세현.
놀란 토끼 눈을 하고 해인을 바라보았다.
“참, 말은 잘해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여자를 만나왔으면 이렇게... 줄줄 청산유수일까...
가요, 인제!! 여기 문 닫는다...!”
어리둥절한 세현.
해인은 미소를 지으며 세현의 오른쪽으로 다가와 가볍게 손을 잡아끌었다.
“에휴...모르겠다...!!!”
조금 더 가깝게 밀착한 세현과 해인.
서로의 얼굴에는 수줍은 미소를 띠고 정면만을 주시한 채, 원형 경기장의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이제 문 닫습니다. 빨리 나오세요!!”
“예, 예!!!”
폐장 시간에 쫓겨 원형경기장에서 나온 세현과 해인.
야심한 밤, 아를의 시내 가로등이 만들어 준 그림자의 주인공들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아무래도 [그들만의 세상]이 워낙에 글도 그림도 대 히트를 쳤었던 작품이니 만큼
글 작가와 함께 그림 작가까지 한꺼번에 인재를 탐색해 보려는 계획인 듯해요. 일타쌍피죠. 출판사 입장에서는...”
“아, 그래? 그럼... 글만으로 제출하면 좀 불리하려나...”
“음...불리한 것 까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타이틀 자체가 소설공모전이기도 하고, 어느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심사를 할지조차 복불복인 공모전이니까,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그래, 알았어. 고맙다 매번...!!
제출 하는 날, 같이 밥이라도 먹자!!”
“예, 선배님...! 파이팅이예요!!”
공모전을 주최하는 출판사의 기획담당 직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백을 등에 업게 된 기태.
그것도 팬임을 자처하는 열정적인 정보통 후배 소현 덕분에 공모전에 대한 소소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소설 공모전임에도 '형식이 자유롭다'고 하는
그 미묘한 항목 때문에 머리를 굴리며 아직까지 제출을 미루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면, 출품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일러스트를 덧붙이겠지? 음... 아무래도 있는 애들하고 상대하려면 준비하는 편이 나을 듯한데...’
어마어마한 경쟁력을 뚫어야 할 공모전 제출용으로 함께 할 파트너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따로 친분이 있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있지 않던 기태로서는 결국 프리랜서와 같이 작업 할 수밖에 없는 노릇.
홈페이지나 블로그 등에 일러스트 작품들을 전시하며 자신의 그림 분위기를 홍보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선별하기에 앞서 걱정이 되는 것은 이 전부터 고민했던 소설의 사전 유출 문제였다.
일러스트가 그려지려면 소설의 이야기와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를 파악해 작가와 함께 방향을 잡아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
원고 투고를 위한 작업이 아니라 피치 못하게 ‘경쟁구도’에 놓이는 [공모전]이라는 특성상,
제출 전 누구에게도 공개하기가 껄끄러운 상황이거늘,
같이 일을 하기로 한 동업자 일 지라도 어딘 가로 유출 되거나 하는 일이 생겨버릴 위험은 배제할 수 없다.
친분도 없이, 그저 일러스트 대금을 지불해 한 번의 프로젝트로 함께 할 처음 보는 사람을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소설은 완료 되어있는 상황.
기태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아 꼼꼼히 확인하였다.
수백, 수천명의 정보가 담겨있는 듯한 사이트.
실제로 현역으로 동화작가나 다른 작가들과 계약을 맺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많았다.
“여보세요? 일러스트레이터 ㅇㅇㅇ씨 되십니까? 작품...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자신이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지만 확실하게 원하는 이미지의 방향은 있었던 듯,
그 스타일과 가장 가까워 보이든 화가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취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번 달 작업이 너무 밀려있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몇 작품이요? 네? 이미지 한 장이요?
얼마를 생각하시는 데요? 음...그 금액이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음, 어떤 장르의 이야기인가요? 음, 죄송합니다. 그쪽이라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유출의 불안감은 버리지 못하면서도 무수히 연락을 시도했건만, 선별한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는 모두 스케줄이나 금액 등을 이유로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골이 지끈지끈한 기태.
작품의 유출, 삽화 금액, 일러스트레이터와의 합... 끊임없는 고민으로 시달리던 그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이건 뭐니 뭐니해도 단편소설 공모전이야! 물론 이래저래 조건을 내걸었으니 준비를 하면 약간의 메리트야 있겠지만, 소설 내용이 좋으면 아무도 뭐라 못 할 거야!! 이번 소설은 내용만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어!!’
기태는 삽화나 다른 장치를 붙이지 않고 오로지 글로만 승부를 보기로 했다. 다른 때 참가했던 공모전들과 같은 방식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 동시에 접수를 해야 한다는 공모전 제출.
기태는 겸사겸사 공모전에 있어 많은 정보를 주었던 후배 소현과 밥을 같이 먹을 생각으로 출판사로 직접 방문해 제출하기로 했다.
“소현아, 오늘, 소설 제출하러 가려고. 여러 가지로 도움 많이 받았는데, 오늘 같이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되니?”
“아, 선배님. 오늘...잠깐만요... 좀 겹칠 것 같기도 한데, 7시 경에는 될 것 같아요. 와, 이제 제출 하시는 거예요? 글 말고 다른 장치 같은 건 해두셨어요? 삽화라던가, 제본이라던가...“
“음, 이것저것 알아는 봤는데, 역시 글 공모전은 글로 평가 받는 게 제일 나을 거 같아서 다른 것 안하고 그냥 글만 해서 내려고.”
“아, 그러시구나. 그래요. 아무래도 글이 제일 중요하긴 하죠. 글자체가 별로인데 포장만 번지르르 한 것보단...아무튼 수고하셨어요!! 그럼 이따 뵈요!!”
애초부터 글을 쓰고 창작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이런 여자 친구를 사귀는 편이 나았었을까.
여자 친구도 뭣도 아니고, 그저 우연히 다시 만난 과 후배인데 잠깐의 이야기만으로 용기가 샘솟고 기분이 좋아진 기태.
속물이었던 전 여자 친구를 까는 내용으로 글을 써서 제출하려는데, 새로운 여성이 등장해 응원을 해주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자신이 가장 원하는 분야에서 누군가에게 응원을 받고 있다는 느낌.
결코 나쁘지 않았다. 혹시나 여기서 더 가까운 인연으로 발전됨을 기대해 봐도 좋을지.
기태는 망상 매니아였다.
여전히 과장 가득한 망상을 즐기며 소중히 원고를 뽑아들고 기태는 출판사로 향했다.
이 두근거림의 정체가 과연 공모전에의 기대인지 소현에 대한 흑심인지는 본인도 분간이 가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평소와는 다른 심박수가 느껴졌다.
약간은 이른 시간, 출판사의 정문쯤 다다르자 우연찮게 소현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보이지 않았건만, 바지 정장을 갖추어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청초하면서도 매력적인 커리어 우먼의 모습.
소현은 기태를 발견하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 소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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