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화 _ 좋아합니다 ]
[ 7시에 레스토랑 앞에서 봐요, 해인씨.]
여유롭게 출판사에 소설을 제출한 세현은 해인에게 당부 문자를 보내놓은 후,
주변을 천천히 산책 하며, 해인도 느꼈었을 이곳 아비뇽의 감상을 고스란히 전달받고 있었다.
교황청이나 노틀담 성당 등, 웅장함에 압도됨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고스란히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얼룩이나 먼지가 무늬처럼 배어,
마치 원래부터 그랬듯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자연 위에 구축해놓은
[ 그들만의 세상 ] 이었다.
그리고 그 후손이라며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 역시 그 세상에의 방문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이야기를 들으러 소설 [ 그들만의 세상 ]을 찾는 독자들같이.
아버지라는 거대함 앞에 눌려 온통 불만 투성이었던 과거. 벗어나고 싶었고, 헤어 나오려 애쓰다 보니 지금 이곳에까지 와 있다.
아버지처럼 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고 싶어 창작을 결심, 가진 것을 비우고 집을 나오던 순간부터 세현은 ‘혼자’가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 주변인이든 열정이든, 다른 것들로 채워져 간다 생각하는 순간부터,
아이러니하게도 다시금 이제까지 전혀 느껴지지 않던 고독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 어렴풋이 그 고독에서 벗어나게 해 줄 누군가가 떠오르기라도 했는 지
세현은 그리 길지 않은 아비뇽 산책을 마치고 바로 차를 몰아 아를로 향했다.
어둑어둑해질 기미를 보이는 하늘.
늘 있어오던 동네이거늘 아를에 가까워 올수록 새삼스럽게 세현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제출 잘 하고 왔니?”
레스토랑으로 돌아온 세현에게 아저씨가 물었다.
“예,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미련 없이 만들었고, 제출까지 했으면, 이제부턴 그냥 없었던 일이다 생각하고 잊고 지내.
네 아버진 공모전 제출하고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지 아니?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지 말야...
김칫국 마시고 별 쇼를 다 했었어! 그 자식...”
“아..아버지가요?”
“그래!! 여기저기 떨어지기도 얼마나 많이 떨어졌었다고!! 그러면 그 때마다 아주 그냥 풀이 죽어가지고 술에 쩔어 진상 피우고...!
아주 그런 찐따가 또 없었다고!! 그런 놈이 유명작가랍시고 무게 잡고 있는 꼴 볼 때면 아주 콧방귀가 뿡뿡 절로 나지 않겠냐!!”
아들의 앞에서도 너무 무게만 잡고 있었던 건지.
세현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
아버지도 사람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 그 아가씨는 보기로 한 거야?”
“예, 지금 작업실에서 아마 일하고 있을 거예요.
일 끝나고 이쪽으로 오라고 했죠. 주신 용돈 탕진하고 와야죠!! 하핫...!”
“그래... 걔는 보니까 좀 쑥맥 같던데, 너무 덥석 들이대고 그러지 마.”
“그렇...죠? 좀 쑥맥 같죠? 요즘 애들 잘 안 그런데...”
집도 코앞이라 매일 마주치고, 어제도 그제도 연락하고 지내던 사이인데, 이날의 약속은 왜 이렇게 떨리는 건지.
긴장을 풀기 위해 아저씨와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심박수는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
“이것 봐!! 내 그림 책정했던 금액이랑 수령된 금액이 너무 다르잖아!! 갤러리 수수료 떼어도 이건 너무 빠진 거 아니야??!!”
“처음부터 얘기 됐던 거잖아! 이번 네 그림은 갤러리 전시 취지에 좀 동 떨어지는 작품이라 전시는 해주는 대가로 판매되면 좀 더 수수료 올려 받기로!!”
“해인 씨! 작성했었던 신청서 금액하고 수령금액하고 갤러리 놈들이 몇 프로나, 얼마나 챙긴 건지 계산 좀 해줄래요?”
“예, 예...!!”
사소해 보이는 작은 다툼들은 몇 번 있었지만, 해인이 들어온 이후로 이렇게까지 크게 싸운 적이 없었던 화가들.
언제나 그러했듯 논쟁의 중심에는 카와모토와 안톤이 있었다.
시각은 세현과 약속한 7시.
그렇지만 해인의 업무 위치상 중재나 자료제공 등을 위해 먼저 자리를 뜰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 세현씨. 갑자기 작업실에 일이 좀 생겨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
거친 분위기 속에서 몰래 재빠르게 문자를 보낸 해인.
“음? 무슨 일 있나... 자유로운 출퇴근이니 하면서 야근 스트레스 없다고 좋아하더니...”
메시지를 본 세현은 예상치 못했던 해인의 지각 소식에 걱정이 앞섰다.
“자꾸 돈 문제로 이렇게 트러블 일으킬 거야?
작업실 얻어줘 고마운 것도 이 정도 어드벤티지를 줬으면 된 거 아냐?”
전에 없던 공격으로 안톤과 카와모토에게 추궁을 하기 시작한 다른 외국인 화가들.
지난 번, 안톤과 카와모토 간의 갈등만 눈에 띠어 내부 갈등은 둘 사이에만 있다고 생각했건만, 화가들 전반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금 뭐야? 또 뭐, 뒷돈이라도 챙겼단 거야?
참, 나 증거도 없이 이렇게 의심해도 되는 거냐고!! 됐고, 갤러리에 확인해보면 알겠네!!”
“해인씨! 갤러리에 연락 좀 해줄래요?”
“예, 아 여보세요? 갤러리죠? 아 ㅇㅇ작업실인데요. 이번 전시 그림 판매금 수령에서...”
“내가 직접 얘기할게요! 줘 보세요!!”
갤리러를 연결해 상황을 설명하려는 해인의 수화기를 뺏어 직접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외국인 화가.
“네!! 저 화가 앤더슨입니다, 제 그림 말인데요!!....”
해인으로선 처음 맞는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게도
'이러다 작업실 사용을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개인적인 걱정이 먼저 앞섰다.
고성이 오고가다 보니 이래저래 시각은 2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워낙 밤새워 작업하는 일이 일상에 되어 있는 화가들에겐 그다지 중요치 않게 생각되었던 모양.
갤러리에 확인을 끝내고 뭔가 착오가 있었던 듯한 분위기로 바뀌어 거칠었던 분위기가 조금은 잦아든 시점에서 카와모토가 말했다.
“후우...해인씨도 있는데 이거 너무들 하는 군!
일단 크게 가져갈 문제는 아니니까, 여기 까지들 하자고... 해인씨, 미안해요. 시간도 늦었는데, 퇴근해요. 내일 봅시다.”
“예... 알겠습니다.”
남자들 네 명의 살기가 오고 간 다툼 때문이었을까, 뭔가 압도되어 살짝 주눅이 든 채로 해인은 작업실을 빠져 나왔다.
‘아이쿠, 완전 늦었네...!’
작업실에서 레스토랑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 해인은 뛰기 시작했다.
“헥헥...”
“왔어요? 해인씨? 뛰어온 거예요?”
레스토랑의 앞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른 뒤 세현을 만나려했던 해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 그대로 세현에게 들켜 버렸다.
“헥...아...느...늦었잖아요... 미..미안해요..헉...헉...”
“에이, 뭐 늦는다고 연락까지 했는데 뭐 하러 이러고 뛰어와!! 얼굴도 벌개 져 가지고...!!
이리 와서 잠깐 앉아 쉬어요.”
카페 앞의 구조물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해인은 잠시 뒤에야 제대로 숨을 고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우...! 아, 이제 됐네...!! 진짜 미안해요!! 갑자기 작업실에 일이 막 터져가지고!!”
“왜요? 무슨 일인데? 그렇게 막 일 터지고, 시끄럽고 그런 장소, 아니라 하지 않았어요?
환경이 그렇게 좋다더니..."
“아니었죠. 이제까진 그런 일 아예 없었으니까!! 근데 어우 남자 넷이 아주 그냥 무섭게...막”
“머...뭐에요 ? 해인씨 막 괴롭혔어요?
이 자식이 내 그렇게 말을 했...”
“아니,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고 작업실 사무 관련한 일이에요. 당연히 그쪽 일 맡아서 하는 나도 같이 있었어야 하는 문제였고...”
“그...그래요? 음...뭐 별일 없는 거면 다행이고...”
흐지부지 말을 흐리며 세현은 해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갑작스런 뜀박질에 근육이 뭉쳤던 건지 가볍게 자신의 다리를 마사지 해주고 있던 해인은 묘한 시선 기척에 세현과 눈이 마주쳤다.
“뭘 그렇게 빤히 봐요? 아, 작품은 잘 제출하고 왔어요?”
“아, 아! 그럼요! 아 해인씨 저번에 아비뇽 갔다 왔었댔잖아요? 거기서 혹시 봤었어요? 출판사?”
“에? 거기에요? [그들만의 세상] 출판사가 아비뇽에 있었다고요? 몰랐지...!! 나는...”
"뭐, 하긴 나도 이번에 처음 안 걸 뭐...프랑스 지사가 아비뇽에 있을 줄은 몰랐지...!"
"이봐요, 젊은 친구들!! 거, 가게 앞에 앉아 장사 방해하지 말고 저~기 나가서 놀아들!!"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오는 아저씨의 외침.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가게 정면에 쪼그리고 앉아 한동안 두런두런 수다만 떨고 있던 상황이었다.
"앗, 죄송해요!! 가, 갈께요!!"
아저씨의 장난이거늘, 이 아가씬 또 그것도 모르고 쫄아서 사과를 하고 있다.
"옙!! 장사 번창 하십쇼!!"
장난스럽게 아저씨와 눈신호를 주고받으며 세현은 해인과 아를의 중심부 쪽으로 걸어 나아갔다.
말없이 앞장서 나아가는 세현.
해인은 그런 세현을 쫓았다. 걸어서 어딘가를 향하는 걸 보니 아를 내의 어딘가를 갈 모양이겠지 하는 예상만 하며.
“세현씨, 근데 무슨 중요한 할 말 있다더니...”
“잠깐만요...!”
세현은 돌아서서, 뒤 따라오는 해인의 손을 덥석 잡아끌며 더 속도를 내어 앞으로 향했다.
“여기는...”
세현과 해인이 10분여를 걸어 도착한 장소는 아를의 랜드마크로도 손꼽히는 원형 경기장이었다.
“해인씨, 여기 와봤어요?”
“원형 경기장? 초반에 들어가 봤었죠!
대표적인 관광명소잖아요...!! 여긴 갑자기 왜...”
“그럼...여기서 전망대처럼 연결되어 있는 곳은 가봤어요? 밤엔 아마 안 왔을 거 같은데...?”
“밤??”
“이리 와 봐요!”
세현은 해인의 손을 계속 잡고 원형경기장의 상층부 쪽으로 올라갔다.
밤이 다 되어 사람들도 거의 없는 상황.
세현이 해인을 데리고 온 곳은 경기장의 꼭대기 전망대.
“와아우...”
저 멀리 흐르는 론강과 아기자기한 집들이 붙어있고 골목 하나하나까지도 세심한 볼거리를 자랑하고 있는 풍경.
마치 아를의 모든 것을 눈에 넣은 느낌이었다.
아를의 풍경이라는 명화 위에 밤 조명들이 덧칠 해, 그림의 품격을 보다 격상시켜준 완벽한 풍경. 해인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요, 옛날에 아버지랑 가끔씩 오던 데에요.”
“아버지라면...임...형우 작가님이랑요? 허억...”
“뭐 별로 남은 기억이 없는데, 여기 오자마자 여기는 다시 와보고 싶더라고요, 목마 태워주면 이 작은 마을이 다 보인다고 신기해하고 그랬었는데...”
아를에 도착한 이튿날.
세현은 아버지와 함께 했었던,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려 이곳을 찾았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기간 동안 그리 많은 변화를 거치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릴 적 그때와 훌쩍 시간이 지나 이곳에 찾았던 그 날, 그리고 해인과 함께 온 지금.
같은 장소이지만 느껴지는 감상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 작품 제출하고 왔잖아요? 그리곤 여기... 같이 오고 싶었어요.”
“우리...작품?”
“그럼요. 우리 작품이죠!! 몇 번을 말했어요!?
뭐 처음부터 잘될 거 기대하면 좀 이기적이겠지만... 우리 놀면서 살았던 거 아니잖아요. 기대할 자격 있다고 봐요. 난!”
여전히 아를의 밤 풍경을 지그시 바라보던 해인은 살며시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저씨가 그러시더라고요. 공모전은 내고나면 발표 때까진 잊고 살라고. 하지만, 준비하느라 힘들고 작업하느라 애썼던 오늘까지만!! 딱 기대를 맘껏 해보자고요!! 안 될 건 또 뭐냐!! 하면서...”
해인은 세현과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공모전 당선의 기대는 [오늘까지]만이고, 이제부터 하는 말은 [오늘부터]니까 잘 들어요!!”
“응?”
"나 해인씨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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