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7화 _ 그 여자 작화, 그 남자 작문 ]
[ 세현씨, 자요? ]
켜져 있는 세현 방의 불을 보고 무작정 보내 본 메시지. 10분이 지나지 않아 해인은 바로 답변을 받아 볼 수 있었다.
[ 안 잡니다~! 인제 정신 좀 든 건가? ]
[부르르르르르...!]
“앗, 깜짝이야!!”
해인은 세현의 문자를 받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아직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건만 이 반응속도만으로 모든 상황이 알고 싶어 죽겠는 기운이 충분히 느껴지는 듯 했다.
세현이 바라는 대로 전 날 기억을 아예 못하고 있는 걸지도.
“넵! 전화 받았습니다. 이 새벽에 어인 일이십니까?”
“세현씨, 세현씨!! 나 어제 어떻게 된 거예요? 세현씨가...나 업어 집에 데려다 놓고 간 거예요?
카와모토씨는 어떻게 됐어요? 회식 자리에서 나 뭐 실수 했어요? 이 3분 해장국은 또 어디서 났어요? 세현씬 지금 뭐하는 데요?”
언제나 처럼, 두서없이 밀려오는 질문들.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지만 세현은 들키지 않도록 이야기를 만들어서 전달해야만 했다.
“어허! 하나씩 하나씩...!! 자, 시간 순서대로 얘기해 줄 테니 서둘지 마요.”
해인은 귀를 쫑끗 세우고 세현의 말에 집중했다.
“자. 내가 어제 해인씨를 본 순간부터 얘기 들어갑니다. 음, 해인씨는 어제 회식한다면서 작업실 화가들하고 우르르 레스토랑으로 몰려왔었어요. 이 부분까지는 기억나죠?”
“예, 그래서 와인...? 마셨죠?”
“응, 외국인들 아주 와인 빠들인지, 몇 병을 아작을 냈는지 모를 정도로 들이 붓더만요, 해인씨도 그 틈새에 끼어 신기해하면서 홀짝 홀짝 잘도 받아 마시고...”
“마...많이 마셨어요? 나?”
“그거야 술자리에 같이 있던 게 아니니까 난 모르지, 그래도 지금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본인 주량은 넘어섰다는 거 아니겠어요? 기절했지 뭐...! 전문용어로 [ 인사불성 ] 이라고.”
“점점 불안해 진다...그...그래서요?”
다 알고 있으면서 괜히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의심이 들면서도
평소의 해인을 다시 떠올리자,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진 채 세현은 마음 놓고 거짓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옆 자리의 카와모토가... 계속해서 깨웠는데 해인씨 안 일어났어요. 어떻게 해요, 내가 집 안다고 카와모토랑 같이 운반했죠. 해인 씨 집으로. 무거워서 혼자는 못 들겠더라고.”
“에...에이...!! 여자가 무거워 봤자지!! 엄살들은...!!”
“음...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세상엔 상식을 깨는 일들이 많이 있습디다.”
“쳇!! 그래서요?”
확실히 속아 넘어간 느낌. 세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대사를 쳤다.
“뭐가 그래서에요? 침대에 눕혀놓고 쪽지 남겨놓고 나왔죠. 뭐!”
“음? 그게 다에요? 이상하다...
분명히 무슨 큰소리로 뭐라 뭐라 막 다투는 소리 들렸었는데...둘이 또 막 싸우고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여자가 기억을 재조합해 사실관계를 기억해 내기 전에 빨리 얼버무려 놓아야 한다.
세현은 재빠른 두뇌 회전으로 다음 변명을 생각해 냈다.
“아...아니, 카와모토 그 자식이 들고 가기 너무 무겁다고 그냥 어깨에 팔 얹어서 걷게 하자는 거야!!
근데 여기까지 거리도 있고, 우리도 더 힘드니까 번갈아가면서 업어서 옮기자고 내가 우겼지!!
그러니까 자기 타임일 때 비리비리 한 게 힘들다고 몇 번 막 쓰러지더라고!! 막 울고불고 힘들다고 땡깡 부리면서!!”
“서..설마...”
“그래서 내가!! 남자 놈이 되어가지고 빌빌대고 앉았다고 막 뭐라 그랬지!! 뭐 그런 상황이었어요.
나는 술 안 먹었으니까 멀쩡하게 다 기억하지!! 이거 팩트예요!! 특히 울고불고 파트...!"
순식간에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세현.
‘역시 난 작가야’ 하며... 자연스런 흐름을 만들어낸 자신의 이야기에 뿌듯해 했다.
“그..그래요? 그러고 보니 좀 걸었던 것도 같아... 아...카와모토씨 얼굴 어떻게 봐...미치겠네...
근데 뭘 그런 걸 가지고 큰소리로 싸우고들 그래요!!?”
“다 운반하는 피사체가 무거우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암튼...그렇게 해서 해인씨가 지금 나랑 통화하고 있는 상황인거예요! 알겠어요?”
“흠...알았어요. 암튼 고마워요... 근데 이 3분 해장국 뭐예요? 어디서 났어?”
“완전 감동받았나 보다. 자꾸 언급하는 거 보니... 그거 일본에 있을 때 아영이가 나 먹으라고 줬던 거예요.
유학생들한테 얼마나 희귀한 아이템인지 잘 알죠? 아영이가 나 주면서도 아까워서 얼마나 손을 부들부들 떨었었다고...!”
“풋...고마워요. 나름 바다건너 온 음식이네...!”
해인을 완전히 속여 아무렇지도 않은 내일을 선물한 세현.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일상적인 대화로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내일은 출근 좀 늦게 해도 된댔으니 충분히 쉬다 나가요. 그리고... 내일 알죠? 나랑 약속 했던거...”
“아, 내일이구나... 알았어요. 흥, 무거운 짐짝 옮기느라 힘드셨을 텐데, 안자고 뭐하는 거예요?
이 시간에...”
“작가는 글을 쓴답니다. 늦게까지...!
생각하는 뭐 이상한 거 보고 그러지 않아요.”
다음 날 제출을 위해 고이고이 모셔 둔 작품을 뒤로하고 다시 원래 진행 중이던 장편 작업으로 돌아온 세현.
처음부터 세현의 목표였던 이 장편 소설은 준비기간과 진행 등을 통틀어 벌써 몇 년 째 이어져 오고 있는 작업이었다.
“해인씨, 얼른 더 자요. 해장국이 지금 당장 땡길 지 모르겠지만, 자고 일어나서 먹고!! 또 얼굴 팅팅 부을라.!”
“흥, 알았어요! 그럼, 내일 봐요, 자요. 얼른 세현씨도!!”
세현은 해인과의 전화가 끝나자마자 저장해둔 카와모토의 번호로 같은 내용을 메시지로 보냈다.
[ 이러저러해서 이렇게 얘기해놨으니까 내일 말 잘 맞춰라! ]
정말로 의도하지 않았던 건지, 나름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던 카와모토.
긴장과 불안함에 깊게 잠들어 있지 못하다 세현의 문자 소리에 놀라 눈이 뜨여지고 말았다.
그리곤 세현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후... 비리비리한 게 쓰러져서 울고불고 땡깡을 부려? 아주 사람을 하체부실에 병신을 만들어놨네...이 자식...대단한 작가 나셨네, 아주... 두고 보자...으으...”
다음날.
다시 잠들었다가 10시가 넘어서야 일어난 해인.
다 깨지 않은 정신으로 목이 말라 주방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어머, 친절하기도 해라..."
3분 해장국만 눈에 띄었던 어젯밤.
테이블의 신경 쓰지 못했던 위치에는 인스턴트 밥과 김치까지 같이 놓여 있었다.
렌지에 데우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잘 차려진 아침 밥상.
"이것도 다 아영이 한테 받아오진 않았을 테고...
저 남자 집 나와 어떻게 살았을 지 안 봐도 보인다, 보여...!"
자신도 오래간만에 접하는 한국식 식사를 즐긴 후 부랴부랴 작업실로 출근을 한 해인.
작업실에는 화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 해...해인씨 왔어요!!?”
“아, 카와모토씨...어젠 진짜 죄송했어요.
수고 많으셨다면서요... 저 업고 가다 넘어지셨다 던데 어디 다치신 데는 없나요?”
“아, 하하,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네, 네! 그리고 힘들어서 막 넘어지고 그랬던 거 아니에요,
저도 같이 술 먹었으니까 그냥 정신이 좀 없던 것뿐이었어요...! 그 세현...씨가 뭐라고 했는 진 몰라도...”
다른 화가들과도 이야기가 맞추어져 있던 건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작업실의 하루를 시작했다.
*
“저, 아저씨... 지난 번에 알려주셨던 공모전 지금 출품하러 가요. 먼저 이거 봐주실래요?”
레스토랑에 반차를 내고 작품을 출품하러 가는 길,
세현은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먼저 보고를 했다.
“이게 낼려고 준비한 작품이야? 어떻게 금새 준비했네? 근데 이걸 내가 먼저 봐도 되는 거니? 이거야 원...! 영광이네...!!”
혹시나 작품에 뭐라도 묻을 세랴 조심조심 낱장을 넘기는 아저씨.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피더니 마지막 문장에 다다르자 흐믓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좋다...! 내가 세현이 네 글은 처음 보는 거지?
옛날 네 아버지도 맨날 글이라고 써와서 보라고,
보고 어떤지 얘기 해 달라고 떼를 썼었는데...!!
이젠 네가 그런 셈이네...! 근데 이거 혹시...”
“네, 맞아요. 여기 자주오시는 노 부부 계시잖아요? 얼마 전에 남편 분 돌아가셨던... 그 분들을 메인 스토리로 한 이야기예요. 물론 더 꾸며낸 부분이 많지만...
아저씨 덕분에 만났던 분들이고, 공모전도 아저씨가 알려주셨던 거니까 당연히 먼저 보셔야죠!"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나저나 문장력도 좋고 참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나...! 잘 될 거다!! 그런데, 세현아.”
내러가기 직전인데, 어디 틀린 문장이나 잘못된 표현이라도 발견한 걸까. 갑자기 세현을 부르는 아저씨의 말에 불안감이 엄습해 온 세현.
“네, 네?”
“ 끝에 이... 그림말이야...!”
“예? 예 삽화를 넣어도 되는 자유형식이라 같이 넣었어요, 왜...그러세요?”
“어떻게 글하고... 이렇게 딱 떨어지게 어울릴 수가 있지? 정말 글을 다 이해해서 정서까지 담아 표현된 느낌인데... 그림까지 네가 그린거야?”
다행이다. 혹여나 다른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자신이 보기에도 그런 것을, 처음 보여주는 타인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했다면, 그것은 필시, 좋은 징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림은...해인씨가 그린 거예요. 잘 아시죠?
저 앞 작업실에서 일하는...한국 아가씨...”
“아,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이렇게 같이 뭘 만드는 중이었구나...!!”
아저씨는 작품을 다시 조심조심 담아 세현에게 넘겨주며 말없이 레스토랑의 사무실 쪽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자...!”
무심하게 차 키를 던져주는 아저씨.
얼떨결에 던져진 차 키를 받고 있는 찰나, 아저씨는 웬 봉투까지 세현에게 건냈다.
“귀중한 원고인데, 조심해서 잘 이동시켜야지!
출판사 주소는 알지? 아비뇽 쪽에 있는...
차타고 갔다 오고, 이건 그 아가씨랑 데이트하는데 써! 둘이 같이 작업한 합작이면 오늘 같은 날은 기념해야지!!”
“아, 아저씨 월급도 주시잖아요!! 저 돈 있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허! 받아라! 이건 아르바이트 사장이 주는 돈 아니고, 아버지 친구로서 주는 용돈이야!!”
“아... 참... 그럼...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시크하게 웃어 보이는 아저씨.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게로 들어갔다.
덕분에 기동력을 얻게 된 세현.
보조석에 작품을 놓고 안전벨트까지 단단히 채운 채로 이동을 시작했다.
해인이 처음으로 유럽에 와 ‘여행’의 느낌을 받으며 지금 그림으로까지 그려지고 있는 그 장소.
아비뇽에 도착한 세현은 [ 그들만의 세상 ] 출판사의 프랑스 지부를 찾았다.
한국의 본원에 비해 규모는 비교적 작은 장소.
그렇지만 이곳 역시도 직원들의 분주한 움직임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모전 작품 제출하러 왔습니다. 어디에 내면 되나요?”
“예 저쪽 복도 끝 편 파란 문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제출 처로 향하는 내부 복도의 양면으로는 출판사의 자랑거리, [ 그들만의 세상 ] 의 관련 자료들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다다른 제출 처의 문 앞.
공교롭게도 그 문의 바로 옆 벽면에는
[ 그들만의 세상 ]의 작가인 아버지가 어린 시절의 세현을 품에 안은 채 이곳 출판사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위대한 작가의 아들.
그러나 당연히 출판사의 어느 누구도 장성한 세현을 알아보지 못했고, 제출과정은 허탈하리만치 너무나 간단한 절차로 처리되어졌다.
이제는 자신의 손을 떠난 원고.
작품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으니 결과는 나중 일.
이제는 해인과 축제의 뒷 풀이를 하는 일만 남았다.
[ 7시에 레스토랑 앞에서 봐요. 해인씨. ]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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